<수영하듯 살자> 11화
언제쯤 누군가의 쓴소리에 너스레를 흘리는 멋진 어른이 될까. 어릴 적부터 그런 재능을 갖고 싶었다. 작은 말도 무겁게 받아들이는 성격 덕분에 도무지 닮을 길이 없었다. 대신 다른 방법을 고안했다. 쓴소리를 들을 기회를 일절 없애는 것, 보여주지 않고 열심히 감추는 것이다.
학창 시절 예체능 실습시간이었다. 선생님이 돌아다니며 내 근처를 지날 때마다 긴장했다. 아직 내 마음에도 안 드는 것이 남의 눈에 멋져 보일리 없었다. 예상치 못한 말에 콕 찔리까 봐 신경을 미리 곤두세웠다. 온 집중이 바깥으로 쏠린 탓에 과정과 결과가 기대에 못 미쳤다. 그래서 가능한 몰래하는 버릇이 생겼다. 리포트 작성이나 창작물을 공유하는 모임도 사절이었다. 완벽하지 않은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가시에 찔리고 싶지 않았다.
민망해서 그랬어요
수영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개인 수영장을 가질 경제력은 아주 먼 미래에, 아니 저 멀리 평행세계에나 있을 일이다. 어쩔 수 없이 저렴하고 사람이 많은 구립 수영장을 다녔다. 강습 때 레일 앞쪽에 서볼까 욕심도 났지만 다른 회원과 비교될 것이 두려웠다. 속 편하게 아무도 못 볼 뒤쪽에 섰다. 앞사람과 거리 차이가 많이 나면 연습하던 영법을 멈추고 자유형으로 따라잡았다. 특히 평영이 가장 신경 쓰였다.
평영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개구리헤엄이다. 개구리가 헤엄치는 모습처럼 발목을 바깥으로 꺾고, 종아리를 접었다 펴 발차기를 한다.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평소 개구리를 흉내 낼 일이 없었다. 쓰지 않던 고관절과 다리 안쪽 근육을 움직이려니 그야말로 엉거주춤이었다. 평영만 하면 내 뒤로 교통체증이 생겼다.
하루빨리 제대로 익혀야 했다. 그래야 하루라도 덜 부끄러울 테니. 강습이 끝난 후 10분의 쉬는 시간 동안 몰래 연습했다. 킥판을 잡고 평영 발차기를 하거나 팔동작까지 합세했다. 꾸준한 반복이 효과는 있었다. 다만 혼자서 하다 보니 꼼수를 찾았다. 발차기와 팔 돌리기를 빨리 굴려 속도가 나는 것처럼 꾸몄다. 적당히 가라앉아야 할 상체를 의도적으로 띄웠다. 그래야 숨을 쉬기 쉬웠다. 허리도 아프니 살짝 굽혀서 엉덩이를 물 바깥으로 뺐다. 동작이 점점 우스꽝스러워졌다. 이게 맞나, 의문이 들었지만 이전보다는 앞으로 잘 나가니 장땡이었다. 평영으로는 레일 반바퀴도 못 가던 내가 반대편 깃발에 다다랐다. 맞은편에 수강생이 보였다. 이번에는 그의 시선이 대수롭지 않았다. 분명 나를 보며 ‘나쁘지 않게 하네’ 생각하리라 여겼다. 그러나 기대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저… 평영 하실 때 엉덩이가 그렇게 많이 뜨면 안 돼요.”
‘에이 아직 그 정돈 아니에요’ 손사래를 치려 했다. 다른 반응은 미처 준비 못했다. 그래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아… 네… 조용히 읊조리며 가만히 서있었다. 그는 평영 동작을 설명하다가 내 얼굴을 살피고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괜한 말 한 거 아니죠? 저는 누가 이런 거 말해주면 좋았어서…”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뒤늦게 내 표정을 살폈다. 안면 근육들이 어떻게 자리를 잡고 있나. 하나씩 의식해 보니 아주 어정쩡한 미소를 띠었다. 달갑지 않다고 온몸으로 표현하는 미소, ‘기분 나빠요’ 항소하는 얼굴임이 분명했다.
쉬는 시간이 끝나고 샤워를 하며 생각했다. 내가 기분이 나빴던 건가? 그의 지적에 마음 상할 부분은 없었다. 마냥 못 한다고 비난한 것도 아니었고, 평소에 체력이 좋다며 칭찬도 자주 해주었다. 잘못된 자세로 수영을 하면 다칠 위험이 있으니 선한 의도였겠다. 그런데 왜 이런 순간이 올 때마다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버릴까.
완벽주의
이쯤에서 널리 쓰이는 단어 하나를 빌려온다. 완벽주의란 애증의 관계이다. 머리가 충분히 컸다고 믿었을 적엔 내 자부심이기도 했다. 무언가를 쉽게 관두는 것보다 끈질긴 쪽이 더 멋지니까 말이다. 하지만 함정이 있었다. 내가 그토록 잘하려고 노력했던 이유는 성장을 위한 도전의식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싫은 소리와 실망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한 심리학자는 이와 같은 '불안정성 완벽주의'를 이렇게 표현했다.
완벽주의란 더 나음을 갈구하는 것이 아닌 비판을 받지 않기 위한 노력이다. 완벽주의의 기본 감정은 수치심이다.
부끄러웠다. 스스로 부족해 보일 땐 숨기고 숨겼다. 홀로 골머리가 썩어 문드러질 즘에야 어쩔 수 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보여줬다. 마음속에선 이보다 더 심한 말만 나오지 않으면 된다는 듯이 미리 비난 쿠션을 깔았다. 예상과 다른 기쁜 반응이 나오면 그제야 환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상대의 반응에 일희일비하는 결과주의 태도를 지녔다.
완벽주의는 노력을 이끌어내주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도전과 행동을 주저하게 했다. 덮어두면, 아무도 모르게 하면 쓴소리를 들을 일이 없을 테니까.
너스레를 흘리는 법
생각의 흐름을 바꾸어보았다. 과연 처음부터 수영을 잘해 보이려 이리 애를 썼을까? 물도 무서워하던 이가 그랬을 리 없다. 그렇다면 왜 지금과 달랐을까.
그때는 못한다는 사실을 마음속에 가만히 두었다. 그저 숨만 쉬어도 다행이라고, 발차기가 이전보다 늘었으니 대견하다고 나만의 보상을 쫓아 만족했다. 처음 도전하는 분야이니 부족한 게 당연했기에, 누군가 잘못된 점을 알려주면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 실패해도 다음에 또 잘하면 된다고 기약했다. 초보라는 이유로 말이다.
수영을 시작한 지 반년이 되어간다. 그들 곁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며 욕심이 났나 보다. 부족한 점을 들추면 미끄러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과민했다. 지금 함께하는 이들과 멀어져 버릴 줄 알고 말이다.
육지에서 이미 그렇게 살아왔기에, 물속에서만이라도 다르게 살아보면 어떨지 상상한다. 맞아, 어쩔 수 없지. 아직 초보니까. 엉성한 초심으로 스스로를 다독인다. 어쩌면 너스레는 거기서부터 시작될지도 모른다. 완벽함 대신 허술함에게도 너그러운 미소를 흘리는 것으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