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하듯 살자> 12화
누군가 고민을 털어놓았다. 이유 없이 울적하여 괴롭고, 자신도 모르는 새에 잃어버린 의욕을 되찾고 싶다고.
나는 그의 수심에 깊이 입수해 본 뒤 말했다.
“혹시 너도 수영을 해보면 어때?”
아득한 고민에 어울리지 않는 단순한 결론이었다. 머리와 마음이 복잡하게 엉킨 상대에게는 가닿지 않았을 테다. 그걸 짐작하면서도 꿋꿋이 말했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해봐.
왜 수영 전도를 부업으로 삼을 만큼 지독히 퍼트렸을까. 짧은 권유에 다 담지 못했던 마음을 되짚었다.
회고는 수영을 시작하기 전 나에게 도착했다. 고민을 털어놓은 상대와 닮았다. 불확실한 미래가 불안했다. 잘 살아볼 자신감이 떨어졌다. 정처 없는 조바심에 편히 쉬지 못하고, 이유를 짐작할 세 없이 우울감에 발이 묶였다. 그런 와중에도 긍정과 행동 에너지를 펌프처럼 쏟아내는 이들이 있었다. 멀리서 구경했다. 그런 체력도 타고난 자산으로 보였다. 나는 그걸 가지지 못해 도태될 사람 같아 두려웠다.
이제는 상대가 나를 그렇게 여길지도 모르겠다. ‘넌 그걸 할 체력이라도 있었나 보네.’ 헛웃음을 뱉으며 말이다. 부정할 순 없다. 선뜻 금액을 지원해 준 부모님도, 흔쾌히 함께하겠다는 친구가 있었던 것도 큰 보탬이었다.
그럼에도, 무언갈 잃어버려 되찾고 싶어 한 경험이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감히 권하고 싶었다. 수영을 해보자. 조금만 움직이면 이런 것들을 되찾을 수 있어. 굳게 쥔 상대의 양손을 펴주고 싶었다.
되찾은 건강
타고나길 허약한 체질인 게 죄라며 육체를 방치해 왔다. ‘쉴 시간이 어디 있어, 더 해야지.’ 열성 체질이라는 이유로 시간을 낭비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운동은 사치였다. 기본 50분에 씻고 정리하는 시간까지 합하면 2시간이 훌쩍 지나버릴 텐데. 아까웠다. 한시라도 더 많은 일을 해내야 했다. 그래야 성공에 가까워질 것 같았다. 몸은 의자에 걸쳐져만 있으면 됐다.
그러나 점차 멍 때리는 횟수가 늘었다. 들인 시간에 비해 진전이 없었다. 앉아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정신이 문드러져가는 줄도 몰랐다.
병원에서 혈압을 재면 늘 ‘뛰어오셨나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햇빛을 만끽하며 사뿐히 걸어왔음에도 내 혈압은 125를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건강을 염려하는 질문을 들으니 느슨했던 기분이 차갑게 굳었다. 아빠를 닮아 20대 초부터 고혈압 주의 단계에 속했다. 누군가는 아직 창창하니까 괜찮다고, 등을 한 번 턱 치고 넘길 일이었다. 그러나 내겐 몸을 세심히 관리하지 않을 명분 중 하나였다. 이미 유전적 불리함이 미래의 운명으로 정해진 것 같았다.
수영을 시작한 지 1년이 되었다. 성인이 된 후 처음 혈압이 정상 수치로 나왔다. 타고나길 체력이 약해서, 운동을 하지 않으려던 핑계들이 무색한 결과였다.
타고남보다 더 건강해질 수 있었다. 원인 불명의 어지럼증과 두통이 개였다. 소화기관과 관련된 잔병들이 잠잠해졌다. 그제야 우선순위가 바뀌었다. 성공한 삶 같은 아득한 인정을 쫓느라, 가장 선명한 형체인 내 몸을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튼튼한 몸이 갖춰지니 앞으로 어떻게든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이 생겼다. 그 뒤로는 운동을 미루지 않는다.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건강을 제대로 누려본 자만이 자신의 몸을 더 잘 살피고 아낄 수 있었다.
뭐든 할 수 있지
건강과 함께 찾아온 변화는 자신감이었다. 취업 준비를 하는 동안 탈락을 질리도록 맛보았다. 도전하는 일에 망설이는 시간이 길어졌다. 성공하는 장면이 도저히 그려지지 않았다. 그게 기적만큼이나 거창한 한 방이 있어야만 가능할 것 같았고, 당연히 그 행운은 나를 찾아올 리 없었다. 뭐든 하면 돼. 노력하는 만큼 돼. 대체 누가 퍼트린 거짓말인지 아무도 모르는 소문의 근원지를 원망했다.
할 수 있어. 이 말을 다시 읊조리게 된 건 고작 수영이었다. 커리어나 스펙에 직접 영향을 줄 활동은 아니지만 예상 밖의 나비효과가 일었다.
물이 무서워 평생 헤엄칠 날은 없으리라 굳게 믿었다. 그런 이가 수영을 해냈다. 할 수 없어. 20년 이상 품어온 부정이 산산이 깨졌다. 그러자 발칙한 생각이 스쳤다. ‘이러면 앞으로 못할 게 없을 텐데?’ 얼핏 동떨어져 보이는 취미생활이 일상에 큰 동력이 되었다. 구직 공고를 보며 망설이는 내게 이런 목소리가 울렸다.
맥주병이 수영도 해냈는데, 뭐든 할 수 있지.
제 속도는 달라요
잃어버린 자신감을 되찾았다. 아니, 되찾은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자세히 보니 이전과 조금 달랐다. 어딘가 굼뜬 것 같으면서도 조바심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뭐든 할 수 있어. 남들보다 더 빨리, 더 많이 해야 뛰어나 보이지.
이런 강박에 시달렸으나 이번에는 다른 문장이 머리를 감쌌다.
나는 할 수 있어. 그런데 못 해도 어쩔 수 없지. 오늘은 이 정도만 해도 훌륭해.
수영 수업시간에 늘 꼴등이었다. 물 밖에서는 절대 취했을 리 없는 행동이다. 수석, 대상, A+, 합격, 대기업, 승진. 1과 가까운 결과가 아니라면 만족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수영에서는 달랐다. 남들과 다르다는 걸 인정했다. 느리고 체력이 부족한 걸 받아들였다. 맨 앞 대신 맨 뒤를 자처했다. 홀로 기다렸다가 다시 출발하기를 반복했다. 꼴등을 하는 게 두렵진 않았다.
당연히 전문분야가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여유였겠다. 문제는 그 여유를 한 번이라도 맛을 보았다는 점이다. 꼴등을 해본 잔상이 일상까지 퍼졌다. 지금 못하면 어때, 다음에 잘하면 되지. 성장을 바라보고 미래의 성취를 믿게 되었다.
그 당찬 게으름은 나만의 속도를 규정하기도 했다. 한 짓궂은 선생님이 ‘평영이 왜 이리 느리냐’ 꾸지람을 놓았을 때다. 이전 같았다면 그 말이 마음 한 편에 꽂혀 자책에 유용한 바늘로 쓰였을 테다. 이번에는 달랐다.
저는 좀 느려요. 하지만 언젠간 꼭 익혀요.
여전히 수영을 전도한다
A를 극복하려면 B를 해봐. 안 그래도 잔뜩 조여두었을 일상에 무언갈 더 해보라고 권하긴 싫었다. 대다수 현대인은 더할 게 아니라, 되려 덜어내야 할 처지인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 저런 무책임한 조언은 ‘아직도 부족하다는 착각’에 허우적거리게 한다. 수영을 전도하며 가장 마음이 쓰였던 부분이었다.
아니, 어쩌면 내가 전도하고 싶었던 것은 수영이라는 운동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밤 10시부터 새벽 5시까지 꼬박 7시간을 자고, 당장이 아닌 다음을 기약하고, 자주 꼴찌를 맡고, 조금 느리다고 담담하게 말할 수 있는 힘을 퍼트리고 싶었다. 우리가 믿어온 빠르고 거룩한 성공 대신, 느리고 나직한 성공도 행복에 꽤 유용하다고 말이다.
사실 그건 지구 반대편 같은 먼 이야기가 아니었다. 고작 조금 멀리 떨어진 물 속이나 우리의 근처에 숨어 있다. 그 발견을 함께하고 싶어 오늘도 누군가에게 이야기한다.
“혹시 너도 수영을 해보면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