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하듯 살자> 10화
참새 아주머니, 땡큐 빌어먹을 망치
어느 날 참새 한 분이 들어왔다. 참새를 너무나 똑 닮은 아주머니였다. 붉고 노란 꽃무늬가 촘촘히 새겨진 수영복을 입고 재잘재잘 수다를 떨었다. 적당한 무게가 실린 부드럽고 맑은 목소리였다. 덕분에 그의 수다스러움이 따갑지 않았다. 그저 참새가 신이 난 듯 몸을 통통거리며 짹짹 우는 모습이 떠올랐다.
참새 아주머니의 친화력은 예사롭지 않았다. 처음 보는 사람도 몇 년 본 사이처럼 대화하는 재주가 있었다. 어휴! 오늘은 물이 차네, 관절 빳빳해져서 수영을 어떻게 해. 자기, 나 방금 배영 하다가 누구 다리를 쓸어버렸지 뭐야. 얼마나 민망했는지, 그 사람 괜찮겠지? 어휴 이 아저씨야. 나이도 있는데 그렇게 숨차면 좀 천천히 가. 나도 맨날 뒤에서 쉬엄쉬엄 가잖아. 오호호.
호탕한 웃음과 넉살이 수업 내내 흘러넘쳤다. 어쩌면 초보 레일에서 체력이 가장 훌륭한 사람은 참새 아주머니가 아니었을까. 그의 수다는 지칠 줄 모르고 탈의실까지 이어졌다. 허리를 수그린 한 할머니가 끙차 숨을 내쉬며 접이식 의자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이가 허리 건강에 관해 이야기했다. 참새 아주머니는 낯선 이들의 대화 둥지에 자연스럽게 합류했다.
“아유 허리수술 여간 힘든 게 아닌데. 나도 슬슬 조금만 힘 들어가도 금방 삐끗한다니까요? 이제 다들 조심해야 해. 언니, 그런 말이 있다잖아. 허리 전문 의사가 땅에 백만 원이 떨어져 있지 않은 이상 절대 허리 숙이지 말라했다고. 어떤 물건이 떨어져도 절대 숙이지 말래. 집게를 사요 집게.”
시끌벅적 한참 수다를 떨고는 다시 할머니에게 다가가 말했다.
“그런데 언니라고 불러도 되죠? 너무 젊어 보여서.”
할머니는 힘겹게 다리를 넣은 바지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젠 언니라고 불러주면 뭐. 땡큐 빌어먹을 망치지.”
나는 그 옆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라디오 주파수 건너편 청중이 되려 했으나 할머니의 호탕한 발언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저저, 젊은 아가씨도 웃네. 할머니는 내 반응을 이끌어낸 것이 만족스러웠는지 앙코르 했다. 땡큐 빌어먹을 망치지. 망치여.
그들의 물결에 섞여 '나는' 옅어진다
언젠가부터 사람을 만나는 게 싫었다. 꼼짝없는 청중 역할이 되어주고 싶지 않았다. 이를테면 강연 방송에서 얼굴 비칠 일 없이 목소리만 빌려주는 관중. 하얀 조명과 무대는 말하는 이에게만 주어지고, 말할 자격이 없는 나는 그 바깥 어두운 곳에 앉아있는 역할 말이다.
만나는 횟수를 줄이고 교류를 끊어갔음에도 언제나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옛 인연들의 SNS를 훔쳐봤다. 어깨가 무거워졌다. 내 삶은 왜 이리 버거울까, 나는 언제쯤 잘 될까. 빨대 구멍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좁아진 시야가 나를 향해 고였다. 그들에게서 숨고 싶어졌다. 우울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한병철 저서의 <피로사회>에서는 우울증을 ‘자신에게 고립된 상태에서 나타나는 질환’이라 말한다. 특히 우울증을 떠올릴 때 연상되는 슬픔, 멜랑콜리와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슬픔은 특정 대상과의 유대관계를 전제로 발현하고, 멜랑콜리는 어떤 상실의 체험에서 유발되기에 타인과의 관계가 조건이 된다. 그러나 우울증은 ‘대상이 없고 지향점이 없으며, 모든 관계와 유대에서 잘려나간 상태, 과잉된 자기 상태로 유발된 질환’이라 언급했다.
당시에 위 글을 읽었다면 책을 바로 덮었을지도 모른다. 저서의 멱살이라도 쥐고 흔들고 싶었을 테다. 자기 과잉이라니. 내가 잘난 줄 알면 이렇게 혼자 있겠나, 당신이 뭘 얼마나 잘 안다고. 지금에서야 돌이켜보면 어느 정도 일리 있는 말이다. 우울증을 벗어나는 데에 사람들과 주고받은 짧은 대화가 큰 도움이 되었다.
사랑스러운 이들이 있었다. 같은 레일에 몸을 담그고 있다는 이유로 살가운 인사를 건넸다. 사소한 것이라도 양보하고 기다려주었다. 어떤 대화에도 배에 힘을 주어 호탕하게 웃어젖히는 몸짓 보았다. 매일 아침 수영 가방을 메고 집 밖을 나오면 ‘오늘은 누구를 만나려나’ 기대를 품기도 했다. 그들의 작은 파동이 내 안에 얇은 막처럼 깔려있던 무언가를 흔들었다. 좁고 날 선 자아가 점차 옅어졌다. 다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다시 인사하고 싶어졌다. 상대의 눈가에 힘 있는 주름이 질 수 있도록.
너도 잘 지내?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다. 수영장에서 있었던 즐거운 일을 곱씹거나, 집에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을 되새김질하는 시간이다. 오늘은 다른 생각이 불쑥 떠올랐다. 옛적에 본 얼굴들이 스쳤다. 내가 도망쳤던 이들, 서로를 친구라고 불렀으나 언제나 한 곳을 향해 앞다퉈야 했던 사이.
휴대폰 화면 구석에 숨겨둔 SNS를 열었다. 이제 나와는 멀어진 그들만의 무수한 장면이 일렬로 쏟아졌다. 스크롤 양만큼 몰려왔던 괴리에 곧바로 화면을 껐었다. 오늘은 달랐다.
너도 잘 지내?
화면 속 웃는 얼굴들에게 안부를 묻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