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하듯 살자> 9화
만나는 이와 인사를 주고받는 게 즐거웠다. 상대의 무표정에 부드러운 힘이 실려 입꼬리가 올라가는 순간, 서로를 반가워하는 신호에 마음이 동했다. 낯선 사람들과 가까워지는 일이나 맺어진 관계를 유지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미더운 사교성과 외향적인 취미 덕분이었다.
그런 부질없는 짓은 오래전에 관두었다. 앞을 향하던 고개를 숙이고 골똘히 발 끝만 바라봤다. 그러다가 돌연 고개를 치켜들었다. 누군가가 미웠다. 복수를 꿈꾸는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언제쯤 잘 될까?’, ‘나는 언제 멋있는 인물이 될까?’ 취업을 준비하는 동안 시야가 계속 어딘가를 파고드는 듯했다. 좁고 얄팍해졌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애틋했다. 내 안부와 안위가 가장 중요했다.
더 이상 인사하는 데에 관심이 없어졌다. 일말의 신경도 써주기 싫었다. 아까운 미소를 내어주고 싶지 않았다.
모네의 꽃밭
수영장을 이전해야 했다. 교통비와 수강료를 제 돈으로 충당할 수 있다면 옮기고 싶지 않았다. 기껏 품을 들여 익숙해진 것들을 기억으로 남겨야 하는 게 아쉬웠다. 특히 물 공포를 이겨내는 것부터 함께해 준 수달 강사님이 눈에 밟혔다. 수영을 언제부터 시작했냐는 질문을 받으면 매번 그가 떠오를 것 같았다. 떠나기 전 인사라도 해야 할까? 그러다 멈칫했다. 만난 지 겨우 두 달 남짓한 짧은 기간이었다. 홀로 정든 마음에 주절주절 인사를 남기기는 민망했다. ‘굳이 그런 말을 왜?’ 혹여나 쌀쌀맞은 대답을 하진 않을까 걱정됐다. 감정을 나누는 데에 신중해지기로 작정한지라 인사는 관두었다. 아마 나 말고도 그를 스쳐간 수강생이 많을 테니, 금방 잊힐 테니 괜찮을 거라 여겼다. 다음 달에도 볼 것처럼 ‘감사합니다’라는 말만 남기고 마지막 수업을 떠났다.
새로운 수영장에서의 첫 수업날이었다. 괜스레 행동을 추슬렀다. 눈치껏 뒤로 가야지. 동네 수영장일수록 오래 다닌 사람들이 많을 텐데, 혹여나 텃세를 당하면 어쩔지 겁을 먹었다. 이제는 무시당하고 싶지 않았다. 한글을 배워가는 어린이가 자신의 말솜씨를 유창하다고 믿는 것처럼, 두 영법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다는 게 자존심으로 자리 잡았다. 초보이지만 뭘 아는 초보처럼 보이고 싶었다. 누구에게 말을 걸어야 할지 쭈뼛거리는 기색 없이 곧장 오른쪽 맨 끝에 있는 레일로 향했다. 잠수복을 입고 풀장 주변을 어슬렁 거리는 사람에게 다가갔다. 아마 그가 강사님일 게 분명했다. 코가 오똑하고 가로로 넓게 찢어진 큰 눈매를 지닌 이였다. 날렵하게 각진 얼굴선을 보니 상어가 떠올랐다. 수달 다음은 상어인가. 그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오늘 처음 왔는데요…”
주변에서 쭈뼛거리던 신규 수강생들이 곁으로 몰려왔다. 상어 강사님은 익숙한 듯 사람들에게 차례로 물었다.
“어디까지 배우셨어요?”
사람들마다 진도가 다양했다. 오래전 영법을 모두 익혔으나 10년 만이라는 사람, 누군가는 완전히 처음, 누군가는 자유형까지 할 줄 안다고 말했다. 내 진도가 빠른 편이었다. 평영까지 조금 익혔으니 말이다. 다만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수준 이기었기에 배영까지 배웠다고 얼버무렸다. 강사님은 앞사람을 따라서 자유형을 해보라 했다. 그 정도는 쉽지, 팔꺾기도 못 하면서 기세등등하게 첫 수영을 시작했다.
‘푸학’ 의욕은 기특했으나 여전히 숨이 찼다. 발전했다면 세 바퀴 정도는 거뜬했다. 그 이상은 무리였다. 억지로 더 했다간 첫 수업부터 뻗어버릴 게 눈에 훤했다. 괜히 혼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출발선 구석에 섰다.
숨을 고르는 와중에 한 아주머니가 자유형을 끝내고 돌아왔다. 짧고 가벼운 머리칼과 모네의 꽃밭이 그려진 수영복이 눈에 띄었다. 아주머니는 수경을 들어 올리고 인사했다. 화사한 수영복만큼 맑고 선한 눈이 돋보였다.
“처음 보는 아가씨네, 반가워.”
그는 언제나 초보 레일에서 첫 순서를 맡았다. 강사님의 지시에 따라 몇 바퀴를 돌고 와도 평온하게 숨을 골랐다. 영법 자세도 크게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와 달리 나는 의젓한 왕초보로서 마지막 순서를 지켰다. 숨이 차올라 속도가 더뎌지면 뒤에서 그를 다시 만날 때도 있었다. 꼬리잡기 게임에서 맨 뒷줄에 선 이가 술래에게 붙잡힌 것처럼 말이다. 나는 곧바로 멈추어 뒤를 돌았다. 멋쩍은 마음에 먼저 가라고 손짓했다. 민폐는 딱 질색이었다. 그러나 모네 아주머니는 매번 느긋한 말투로 손사래를 쳤다.
“괜찮으니까 천천히 가. 나 그렇게 많이 하고 싶지도 않아. 힘들어.”
눈에 힘을 풀고 눈썹을 둥글게 들어 올린 표정이었다. 그런 여유로운 눈빛을 지녔음에도 타인의 장점은 기민하게 포착했다. 발견한 것을 혼자만 아껴두지 않았다.
“자기는 배영을 이쁘게 잘하네. 팔을 쭉쭉 잘 뻗던데?”
수영으로 들은 첫 칭찬이었다. 어색한 탓에 나는 웃는 것도 아니고, 찡그린 것도 아닌 어정쩡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이라면 감사하다는 말과 그를 닮은 환한 미소를 띠었을 텐데. 돌이켜 볼 때마다 아쉬움이 남는다. 모네 아주머니는 언제나 선두를 자리했으나 으스대는 조바심이 없었다. 강사님의 지시에 따라 영법을 시작할 때면 꼭 이렇게 말했다.
“자, 천천히 따라오세요.”
덩달아 조급했던 내 자유형도 점점 힘이 풀렸다. 조금 느리더라도, 고개를 돌려 그와 마주치면 분명 편안한 미소로 괜찮다고 말해줄 터였다.
새로운 수영장은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걱정이 무색하게 금세 한 레일에 스며들었다. 아침에 잠이 쏟아져도 수영은 꼭 빠지지 않을 정도였다.
가방을 어깨에 이고 현관문을 열 때면 걱정을 한 아름 담았었다. 수영 끝나고 할 일이 얼마나 많더라, 이것도 해야 해. 저것도 해야지. 잘 되려면.
오늘은 조금 달랐다. 그저 궁금했다. 누가 왔을까? 탈의실에서 훌렁훌렁 옷을 벗은 뒤 샤워를 하며 주변을 살폈다. 오늘 모네 아주머니는 왔을까? 그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을 되새겼다. 꽃밭 그림이 화사하게 그려진 수영복, 아주머니를 닮아 아주 잘 어울린다고. 그러면 틀림없이 그는 웃을 것이다. 눈가에 주름을 지어줄 것이다. 그 모습이 보고 싶어 수영장으로 향했다.
하늘 혹은 천장을 향하던 고개를 내렸다. 앞을 보았다. 반가운 이에게 인사하기 위해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