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문득 '입 큰 더러운 개구리'가 그립다
소소잡썰(小笑雜說)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전인 1988년의 일입니다. '1987'이라는 영화를 통해서도 잘 알려진 것처럼 정말 혼란의 시대였죠. 당시 대학생이었던 저에겐 더더욱 그랬습니다. 학교 주변엔 늘 출동 대기 상태인 전투경찰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학교 운동장 흙은 연일 계속되는 전쟁 같은 시위로 인해 '최루토'라 불리울 정도로 최루탄 냄새에 찌들어 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친구들끼리, 혹은 선후배가 어우러져 술자리라도 가질라치면 자연 비분강개해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 잦았습니다. 그러다 보면 주량을 오버해 달리는 친구들이 많았고, 대학가 웬만한 술집 화장실과 주변 골목들엔 자신이 그날 먹은 술안주를 확인한 흔적들이 널브러져 있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입니다. 강의실에 앉아 수업 시작하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후배 영철이(어디선가 50대 가장으로 의젓하게 살고 있을 후배 보호를 위해 이름은 가명 처리했습니다)가 얼굴이 시뻘겋게 부은 상태로 씩씩거리며 강의실로 들어왔습니다.
평소 백옥까지는 아니어도 얼굴이 허여멀건한 편인 녀석이라 뭔 일일까 궁금했습니다. 저 뿐만이 아니라 다른 친구들이며 선배들도 마찬가지로 궁금해하는 얼굴이었죠. 그런 친구들과 선배들의 궁금증 어린 시선을 의식했던지 영철이는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툴툴거리며 사연을 털어 놓더군요.
"아 글쎄, 입큰 개구리 시키가 말이에요" 하며 털어놓은 영철이의 사연은 이랬습니다. 전날 데모에 참가해 진압 전투경찰들과 한바탕 격전을 치루며 최루탄 가루를 듬뿍 뒤집어 쓴 영철이는 마음 맞는 친구 몇 명과 술 한 잔을 한 뒤 자취방으로 귀가를 했답니다. 그리고는 술기운에 취해 곤한 잠에 빠져 있었죠.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후 준태라는 동기 녀석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집이 좀 멀어서 술을 늦게까지 마신 날이면 종종 영철이 자취방 신세를 지곤 하는 동기 녀석인데, 이날도 밤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선 영철이 자취방을 찾아온 겁니다.
서로 꿍짝이 제법 잘 맞고 장난도 즐겨 치는 사이여서 그랬을까요? 술 취한 김에 그냥 곱게 누워 잤으면 좋았을 것을 이때 준태 녀석에게 장난기가 발동했던 모양입니다. 어쩌면 '어라, 이 녀석 봐라? 군기가 빠져 가지고는 형님이 아직 들어오시지도 않았는데 혼자 디비져 잠을 자?' 하는 생각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느닷없이 잠자고 있는 영철이 배 위에 올라타서는 "영철아 영철아, 형님 오셨다" 하고 부른걸 보면 말입니다.
술에 취하고 잠에 취한 상태로 그런 준태의 부름을 받은 영철이는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왜 임마?" 하며 대꾸를 했는데, 아뿔사!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웨에에에에에액~" 하는 괴성과 함께 준태가 영철이 얼굴 위로 그날 먹은 술과 안주를 쏟아냈답니다.
평소에 먹는 배도 크고 입도 커서 입 큰 개구리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녀석이 기습적으로 그날 먹은 걸 다 쏟아냈으니 잠자리에 누워있던 영철이는 피할래야 피할 방법도 없었고, 심지어 일부 파편은 입 안에까지 침습을 했다고 합니다. 참사도 그런 대참사가 없었죠.
입 큰 개구리가 쏟아낸 건 비단 그날 먹은 술과 안주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거기 더해 위산까지 버무려 아낌없이 쏟아냈던 모양입니다. 사건 직후 비누를 벅벅 칠해 얼굴을 깨끗이 닦아냈지만 아침까지도 원상복구가 안돼 벌거죽죽한 낯빛에 팅팅 부은 얼굴로 학교에 나온 걸 보면 말입니다.
뒤늦게 강의실에 들어온 준태는 그가 저지른 천인공노할 만행에 치를 떨고 있던 친구들이며 선배들로부터 등짝을 한 대씩 두들겨 맞는 집단구타를 당했고, 별명도 입 큰 개구리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 돼 '입 큰 더러운 개구리'로 바뀌었습니다.
30여년이 지난 지금, 어쩌다 그 시절을 돌이켜 생각할 때면 우리들은 그 얘기를 곱씹으며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곤 합니다. 참 신기한 게 오랜 세월이 흐른 뒤라서 준태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반면 '입 큰 더러운 개구리'라는 별명을 기억 못하는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없다는 겁니다. 그만큼 입 큰 더러운 개구리 사건은 그 당시 전설로 회자될 만큼 유명했고, 반향 또한 큰 사건이었다는 반증이겠죠.
모든 추억은 아름답다는 말이 있듯이 정말 암울하고 힘든 시절이었지만, 사회에 진출해 이런저런 상황들과 부대끼며 한 30년쯤 살다 보니 문득문득 그때가 그리워지곤 합니다. 최루탄에 찌든 캠퍼스를 누비며 이틀이 멀다 하고 데모를 벌이고, 부패한 정치권력과 사회 부조리에 가슴 아파하며 거의 날마다 술에 취해 살았지만, 우리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신념과 열정, 자신감이 그때 우리에겐 있었고,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푸르디 푸른 젊음이 있었으니까요.
오늘 문득 입 큰 더러운 개구리 녀석과 그 녀석의 등짝을 후려갈기며 함께 깔깔거리던 옛 친구들이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