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가 남긴 강렬한 죽음의 흔적을 보며 나는 오래 전에 읽었던 '한 생명이 깃든 글자 한 획' 이야기를 떠올렸다. 아래는 그 대략적인 내용이다.
한 부자가 아주 귀한 비단 한 필을 얻었다. 그는 그 비단으로 무얼할까 고민하다가 병풍을 만들기로 했다. 이를 위해 고명한 명필을 불러다가 글씨를 써달라 부탁하기로 했다.
부자가 명필을 구한다는 소문이 나자 백수건달 하나가 기회다 싶어 그를 찾아갔다. 명필인척 속이고 한동안 공짜밥을 얻어먹을 요량이었다. 그는 자신을 엄청난 명필이라 소개하며 글씨를 잘 쓰기 위해선 일정 기간 몸과 마음을 정갈히 가다듬어야 한다고 속였다.
부자는 백수건달 말을 철석같이 믿고 그날부터 극진한 대접을 베풀었다. 매일매일 최고의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했다. 그러나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백수건달은 도무지 글 쓸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제서야 뭔가 좀 미심쩍다는 생각이 든 부자는 최후통첩을 날렸다. "아무 날 아무 시까지 병풍에 글씨를 쓰지 않으면 사기죄로 관아에 고발하겠다"고 경고한 거다. 관아에 끌려가 치도곤 당할 위기에 처한 백수건달은 어쩔 수 없이 붓을 들었는데, 한 글자 쓰는 순간 바로 들킬 것 같아 잔뜩 겁을 집어먹었다.
그런 백수건달 속도 모르고 부자는 빨리 쓰라고 옆에서 재촉했다. 만일 자신을 속인 거면 관아에 신고해 물고를 내버리겠다는 협박도 곁들였다. 이판사판이란 생각이 든 백수건달은 눈을 질끈 감은 채 혼신의 힘을 다해 비단 위로 한 획을 죽 그렸는데, 너무 긴장한 나머지 발을 헛디디면서 넘어져 죽고 말았다.
사람 죽은 것보다는 백수건달놈에게 속아 귀한 비단 버리게 된 것만 화가 난 부자는 예의 비단을 창고 한 구석에 처박아 두라고 명령했다. 방에 둬봐야 볼 때마다 화만 더 돋울 거라 판단됐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한 눈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스님 한 분이 부자네 집을 찾아왔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집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느껴지는데, 댁에 혹시 귀한 보물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부자가 무슨 기운씩이나 느껴질만한 보물 따윈 없다고 대답하자 스님은 창고를 가리키며 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했다.
이상하다 생각하며 부자가 순순히 문을 열어주자 스님은 한 구석에 처박혀 있던 비단을 집어 들더니 "여기에 한 생명이 들었구나! 나무관세음보살" 하고 나지막히 탄식했다. 알고보니 생사가 오락가락하는 마지막 순간, 백수건달은 그 최후의 한 획 안에 자신의 모든 걸 쏟아부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