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식사를 함께 먹던 중 둘째딸이 야릇한 미소를 머금은 채 눈빛을 반짝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코로나 사태 등으로 인해 친구들 한 번 만나기도 쉽지 않다 보니 재밌는 일이 별로 없는 요즘, 모처럼 재밌는 건수 하나를 만났다는 표정이었다.
표정이나 말투를 보아하니 진짜 보이스피싱 같은 범죄에 노출된 건 아닌 듯 싶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둘째딸은 기다렸다는 듯 "오늘 아침에 잠결에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얼떨결에 받았는데요, 전화기 저 편에서 어떤 아저씨가 '○○택배인데 반품 수거 요청에 아파트 동 주소까지만 적혀있네요. 몇 호인지 좀 알려주세요' 그러는 거에요. 그래서 그런가 보다 하고 우리집 호수를 알려줬거든요" 하고 답했다.
그런데 잠을 깬 뒤 생각해보니 뭔가 좀 수상하더라는 거다. 둘째딸이 반품시키려던 물품은 현재 ΧΧ택배를 통해 배송돼 오고 있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착오로 물품을 잘못 주문한 둘째딸은 운송장 문자메시지를 받고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고, 곧바로 주문했던 인터넷 판매몰을 통해 반품 신청을 접수했다. 그렇게 하면 반품 정보가 택배 기사에게 바로 전달돼 도중에 바로 반송될 거라 생각했던 건데, 뜬금없이 다른 택배사로부터 반품을 수거하러 오겠다고 연락온 게 아무래도 수상하단 생각이 든 거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실 둘째딸은 긴가민가 하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워낙 흉흉한 세상이다 보니 자기가 너무 과민하게 반응한 거라 믿고 싶었다. 그렇게 도서관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는데, 하필이면 아파트 공동현관 앞에서 ○○택배 차량을 딱 마주쳤다. 찜찜함이 좀 남아있었던 터라 둘째딸은 마침 잘 됐다 싶어 쪼르르 달려가서는 택배 기사님에게 인사를 건넨 뒤 "000호 물건 반품처리 잘 됐죠?" 하고 물었다.
문제를 더 키운 건 ○○택배 기사님 반응이었다. 배송 목록을 확인하는 한편 둘째딸을 향해 반갑게 아는 척을 하시며 "000호 따님이시네. 그 집 택배는 접수된 게 없는데..." 하고 답했기 때문이다. 둘째딸은 예기치 못한 반응에 깜짝 놀라며 "저, 저, 저를 아세요?"하고 말까지 더듬으며 물었다. 얼굴 한 번 본 기억이 없는데 택배 기사님이 자기가 어느집 딸인지 아는 척 해오는 게 순간 당황스러웠던 거다. 도서관에 가느라 화장도 안한 채 대충 집에서 입던 옷을 입고 나간 터라 더 그랬을 거다.
하지만 엄마를 기억해서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어물쩍 넘긴 뒤 둘째딸은 "오늘 아침에 분명히 ○○택배라며 반품 수거하러 온다고 하셨는데 기사님 아니셨어요?" 하고 다시 물었다. 그러자 택배 기사님은 "이 동네 ○○택배가 나 혼자 도는 게 아니라서 다른 분일 수도 있어요" 하고 친절하게 알려줬다. 택배회사 하나당 한 동네에 한 명씩 택배기사가 도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찜찜한 느낌을 해소하지 못한 채 돌아서는 찰나 문득 둘째딸 머릿 속에 이런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고 한다. '분명 내가 ΧΧ택배에 반품 신청을 했는데 ○○택배가 올리가 없잖아. 이건 분명 우리집을 노린 보이스피싱 사기가 틀림없어!' 하는 게 그것이었다. '잠결에 내가 부주의하게 주소를 알려주는 바람에 우리 엄마가 혼자 집에 있다가 범죄에 노출되는 거 아냐?' 하는 걱정과 함께 말이다. 그래서 집으로 다시 돌아가 엄마에게 사실을 알린 뒤 함께 있어줘야 하나 하는 생각도 했다고 한다.
다행히 함께 나갔던 큰딸이 그런 둘째딸을 극구 만류했다. 그건 지나친 상상이고, 엄마는 아무한테나 함부로 문 열어주는 사람도 아니니 걱정 안 해도 된다고 동생을 설득한 거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또 그럴 듯 하다 싶었던지 둘째딸도 언니 말을 이내 수긍했고, 그래서 둘은 계획대로 나란히 사이좋게 도서관으로 향했다. 이쯤에서 '그리하여 두 사람은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로 끝났음 참 좋았겠지만 말이다.
둘째딸이 어질러놓은 사건 설거지를 뒤집어쓴 건 아내였다. 아무런 영문도 모르는 채 집에 남아있던 아내는 딸들이 집을 나선 얼마 후 반품 수거차 우리집을 방문한 ○○택배 다른 기사님을 맞아야 했기 때문이다. 예고없이 들이닥친 반품 택배 기사를 맞아 아내는 당황했고, 바쁜 택배 기사님을 오래 기다리게 만드는게 미안해 '이런 시베리안 허스키~'를 연발하며 허겁지겁 딸들 방을 뒤져야만 했다.
하지만 어디어디 물류센터와 대전 허브쯤을 거쳐 이제 막 우리집이 있는 전주시 경계를 넘었을까 말까 한 택배 물품이 거기에 있을리 만무했다. 둘째딸 방과 큰딸 방을 오가며 이잡듯 수색작업을 벌이던 아내는 결국 두 손을 들었고, 택배 기사님께 "딸들이 지금 도서관에 가있어 연락이 안 되는데, 물건 꼭 찾아서 내일 오실 때 드릴게요" 하고 사과 드리며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사건은 우리 가족이 택배 시스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까닭에 꼬이고 꼬인 거였다. 택배 반품은 최초 배송사가 어디였는가와는 상관없이 반품 신청이 접수되는 순간 선착순으로 반품콜을 따내는 택배업체가 맡는 방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까 둘째딸이 잠결에 통화한 ○○택배 기사는 그렇게 잽싸게 반품콜을 따낸 뒤 부랴부랴 연락을 해온 거였고, 이를 알리 없는 둘째딸은 ΧΧ택배가 아닌 ○○택배란 말에 보이스피싱 범죄까지 떠올리며 지레 호들갑을 떤 거였다.
사건의 전말을 듣고 난 나는 혀를 끌끌 차며 "그래서 반품할 물품은 어떻게 됐어?" 하고 물었다. 다음날 다시 올 ○○택배 기사님이 두 번 헛걸음을 하게 만들지 않으려면 미리 준비해 놓는 게 좋을 거란 판단이 들어서였다. 그러자 둘째딸은 "그거 오○○ 씨가 반품 처리해 주셨어요" 하고 답했다. 갑작스런 낯선 이름 등장에 내가 "오○○ 씨는 또 누군데?" 하고 물었더니, 둘째딸은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ΧΧ택배 기사님 이름이 오○○ 씨에요. 문자에 단골로 뜨는 이름이라 우리끼린 ΧΧ택배 대신 '오○○ 씨한테 또 연락왔다' 그러고 지내요, 호호" 하고 대답했다.
그러니까 아파트 앞에서 ○○택배 기사를 만나고도 찜찜한 기분을 떨치지 못한 둘째딸은 ΧΧ택배 오○○ 기사님과 통화를 했고, 나름 단골 고객이랍시고 오○○ 기사님이 배송 중이던 물품을 임의로 반품 처리해 주기로 했다는 거였다. 어렵게 반품콜을 잡았는데 헛수고만 한 셈인 ○○택배 기사님께는 따로 전화드려 사정을 설명드리며 죄송하다고 사과했고, 다행히도 너그럽게 이해해 주셨다고 했다.
옆에서 같이 얘기를 듣고 있던 아내는 그렇게 무슨 재미진 모험담이라도 들려준다는 듯 조잘거리는 둘째딸을 째려보며 "나이 많은 어른한테 오○○ 씨가 뭐니, 버릇없게" 하고 짐짓 퉁을 줬다. 앞서 둘째딸 때문에 예기치 못한 반품 택배기사 방문을 받고 당황해 허둥거렸던 일이 생각나 더 그런 듯했다. 그러나 둘째딸은 그런 제 엄마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이, 우리가 설마 그분 앞에서 그러겠어? 우리끼리 있을 때만 오○○ 씨라고 부르는 거지" 하며 깔깔댔다.
"오○○ 씨가 반품 처리해주셨어요", "오○○ 씨가 누군데?", "택배기사님 이름이 오○○ 씨에요", "나이 많은 어른한테 오○○ 씨가 뭐니?", "우리끼리 있을 때만 오○○ 씨라고 하는 거라구욧" 하며 수없이 오○○ 씨 이름이 우리집 저녁밥상 위를 오가는 바람에 아마 이날 오○○ 씨 귀가 좀 많이 가렵지 않았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