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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도빈 Oct 24. 2021

하산의 즐거움

하산의 즐거움   

  

무릇 친구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경쟁이 늘 존재하는 법이다. 친구 영수와 등산을 하기로 했다. 영수는 각종 운동으로 단련된 자칭 스포츠맨이었지만 등산은 초보라 할 수 있고, 청계산은 나름 나의 바운더리였기에, 이번만큼은 나도 자신이 있었다.      

등반에 앞서 나는 그에게, 자네는 처음이니 무리 말고 천천히 내 발 뒤꿈치만 따라와 보게, 라는 충고로 여정의 시작을 알렸다. 


시작이 반이라 했던가. 출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미 산의 절반을 오른 사람처럼 가쁜 숨을 쉬기 시작했고, 곧 에너지가 바닥날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아 역시 어제 2차는 무리였지 꼬막무침에 혹하다니 라며 자기반성을 하고, 이번 주도 과로 했지 하지만 페달 밟기를 멈춘다면 자전거는 곧 넘어져 버려 하며 자찬 하다가, 집에서 라면이라도 먹고 나와야 했어 속이 쓰리고 울렁대 구역질이 날 것 같아 라며 혼자 구시렁거렸다. 이렇게 반성과 자찬 속에 예상대로 페이스가 급격히 떨어진 나를 영수는 본의 아니게 앞질러 갔다. 그렇게 나도 본의 아니게 그의 뒤꿈치만 좇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다 영수의 뒤꿈치는 점점 멀어져 갔고 마침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첫 봉우리에 먼저 도착한 영수는 사력을 다해 기어오르는 나를 응원이라도 하듯, 개선장군처럼 긴 스틱 옆에 차고 입 꼬리를 실룩대며 히죽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 내가 이 봉우리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오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나로서는 최선을 다한 것이며 대견한 일이었다. 다만 지금 현재 그가 나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있을 뿐. 

내 심장은 만주 벌판 기관차의 엔진처럼 뛰었고, 숨을 턱에 차다 못해 정수리로 들고 뿜었지만, 친구 좋다는 게 뭔가, 나는 히죽거리는 그의 면상에 대고 충고했다.

헉, 헉... 자네는 처음이라 모를 텐데...등산 전에 절대로 과음하면 안 돼. 헉, 헉, 과로도 삼가야 해. 헉, 헉, 먹고 살기 힘들어도... 자전거 넘어지면 좀 어때... 헉, 헉... 망가지면 다른 자전거 타면 되지...

이런 나의 진심에도 그는 자기 할 말만 한다. 영수는 원래 그런 놈이다.

야, 뭐이리 느려 터져? 아까부터 기다렸잖아. 밥을 해먹어도 설거지에 과일까지 다 먹을 시간이다. 그나저나 여기 삼거린데, 왼쪽? 오른쪽? 어디로 가야 정상인거냐?

나는 오른발을 땅에 구르고 허공에 박수를 쳐대며 박장대소 했다.

허허허! 영수 자네가 아무리 날고 기어본들 소용없구나. 길을 모르는데 정상이건 목표건 무슨 소용 있으랴. 내 딱 알려주지. 어느 쪽으로 가든 길은 다 통해 있으니 자네는 선택하면 되네. 다만 경험에 비추어 보건데 오른쪽이 더 나을 걸세. 시간이 좀 더 걸리긴 해도 완만한 편이거든.

내 충고를 들은 영수는 신이 나기라도 한 건지 입 꼬리를 몇 번 더 실룩거리고는 대답 없이 왼쪽 길로 다람쥐처럼 내 달렸다. 그런데 사실 왼편이 완만한 길이었다. 나는 영수가 이럴 줄 알고 있었기에, 그래서 그에게 반대로 알려주었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 다시 전진했다. 드디어 두 번째 봉우리. 이번에도 영수는 사력을 다해 기어오르는 나를 보며 히죽거렸다. 나는 그저 정상이 저쪽 방향에 있음을 말없이 손만 허우적거려 알려 주었다. 사실 나는 그 때 이대로 내려가 해장국이나 한 그릇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허나 나란 남자, 뭐든 한 번 시작하면 웬만해선 포기하지도 뒤돌아보지도 않으며, 기어이 끝장을 보고야 마는 불꽃 남자... 일리 없지 않은가. 그러니 그래도 되었다. 포기해도 되었다. 정상? 그것이 무슨 의미더냐. ‘여기까지’라 선언하면 그것으로 된 것을. 어차피 정상도 내가 짓는 것이요, 한계도 내가 짓는 것이니 말이다. 허나 모든 결과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 그 책임을 조금이라도 회피하기 위해 지금 필요한 건 하산해야할 피치 못할 이유, 그것이었다. 왜, ‘명분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소설이라 여길지 모르겠지만 그때였다. 마른하늘에서 무언가 후두두둑 떨어져 내 뺨을 때렸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이 무슨 호랑이 장가가는 날에 축포란 말인가. 찾았다. 내려 가야할 이유. 영수가, 어라? 비 온다? 내려갈까? 하고 물었고, 나는 다음 충고를 전했다.

그러면 안 돼. 그렇게 뭐든 쉽게 포기해서는 안 돼. 고지가 눈앞인데, 우리 애들이 뭘 보고 배우겠는가. 사내가 가랑비 따위에 흔들려서 쓰겠는가. 호연지기를...

영수가, 그래? 그러면 정상까지 계속 올라... 라고 내 말을 끊었기에, 나도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말했다.

허허허! 알겠네, 알겠네. 이래봬도 우리가 친구 아닌가. 죽마고우 사이는 붕우유신이 덕일세. 하여, 자네 뜻이 정 그렇다면... 여기까지! 하지. 내려가 해장국이나 한 그릇 하세. 


소나기는 금세 지나갔지만, 우리는 하산을 멈추지 않았다. 땀을 씻어주는 소나기와 속을 씻어주는 해장국. 하산에는 이런 기쁨(하산쾌下山快)도 함께 한다. 그렇기에 과음 과로에 찌든 비루한 몸뚱이로 가파른 오르막을 꾸역꾸역 기어오르며, 그 모든 것들을 사람은 견디어 내는 것이다.      

앞에 놓인 뚝배기 속에서 콩나물과 선지, 내장 껍데기들이 팔팔 끓고 있다. 나는 그것을 한 술 떠 입에 넣고는 친구에게 마지막 충고를 전했다.


이보게 친구. 우리 인생 지금 어디쯤 온 것 같나. 아직 기어오르는 중인가, 아니면 이미 내리막인가, 그것도 아니면 그 잘난 명분 같은 거 찾고 있는 중인가. 이 또한 아니라면, 경로를 이탈해버린 걸지도... 그런데 아무려면 어떤가. 이 또한 산행의 일부이며 우리는 아직 산에 있지 않는가. 또 언젠가는 하산의 즐거움이 기다리지 않겠는가. 게다가 우리가 함께이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래도 우리가 친구 아닌가.  

젓가락으로 콩나물을 건져 올려 후후 불며 친구가 말했다. 

야 내일은 후후! 관악산 어때? 내일도 날씨 좋다는데? 

나도 선지를 집어 후후 불어 입에 넣었다. 비 비린내가 났다. 내일도 비가 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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