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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린 Jul 30. 2022

눼~ 눼~ 참 좋은 회사 다니셨네요

좋은 회사에 대한 기준은 대체 무엇일까?


E는 그토록 퇴사를 바랐던 이전 회사의 이야기를 종종 꺼내곤 했다. 그동안 E가 정치질이 심하다며 그토록 욕했던 조직문화 말이다. 뒤에서는 상사를 욕하면서도 앞에서는 무조건 복종하고 잘 보이기 위해서 아부하는 팀원들 역시 E의 비난의 주된 대상이었다.


어느 날 E는 나에게 잔소리를 하고 난 뒤에, 이런 말을 덧붙였다.

"회사 생활이 다 이런 거지 뭐. 뒤에서는 시발 시발 하지만, 앞에서는 또 웃는 얼굴로 대해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 예전에 우리 회사에선 다들 그랬어요”

'뭐라고? 예전에 다니던 회사의 조직 문화가 별로라서 퇴사한 거 아닌가?'

“결국 그 회사에서 퇴사한 걸 보면, 그렇게까지 좋은 회사는 아니었던 것 아닌가요?”

E는 내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요. 그러는 팀장님은 뭐 좋은 회사를 다녀보긴 했어요?”

내가 다닌 회사들이 E에게는 다 별로였나 보다. 나는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는 E와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나도 E도 '좋은 회사'에 대한 각자의 기준이 있는 것 같지만, 아무래도 그 둘이 일치할 확률은 별로 높을 거 같지 않다.

‘이런 대답을 듣게 될 줄이야! 눼에~ 예전에 참 좋은 회사를 다녔나 봅니다. 하지만, 글쎄다. 나는 당신이 다녔던 회사의 조직문화를 생각해 보면, 그 회사에 다녔다는 게 그렇게까지 자랑스러워할 일인가 싶어. 지금 당신의 말과 행동을 봤을 땐, 더더욱 그렇거든. 나의 전 직장들에서 더 인간적으로 생활했단 사실을 새삼 느끼고 있는 중이거든. 이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해주는 편이 좋은 건지 나는 오히려 고민이 되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은 보통 그 회사에서의 삶에 절대로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회사를 그만둔다고 생각한다. 회사를 그만둔 직원들이 느끼는 옛 직장에 대한 새삼스러운 애사심과 심히 부담스러운 어깨뽕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그 회사가 정말로 좋은 회사였다'는 증거는 아니다. 특히나 본인이 힘들어했던 특정한 일들을 돌아보면, 이 사실은 더욱 분명해진다. 나에게 정말 '좋은 회사'라면, 그 회사를 떠날 이유가 없다. 사람들은 변화보다는 안정을 추구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원래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가장 신이 난다. 틈만 나면 자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 사람들은 자기 공개에 대한 민감도가 높지 않은 사람이다. 그에 비해 자신에 대한 정보를 노출하기를 꺼리는 사람들도 있다. 회사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사적인 인간관계와는 구분 짓는다. 이건 사람들의 성향에 차이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편이 더 좋다, 나쁘다와 같이 가치 판단을 할 필요는 없는 문제이다. 하지만, 얼마나 자주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느냐에 따라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달라질 수 있다.


본인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유난히 좋아하는 사람들과 오래 있다 보면, 나는 솔직히 살짝 피곤해진다. 이런 사람들은 현재 보다는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힌 '자기 과시형'의 사람들이다. 이들은 누가 물어보지 않아도 과거의 추억담을 끊임없이 소환하곤 한다. 내가 하는 말을 상대방이 재미있게 듣고 있는지에 대해서 별로 개의치 않고,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계속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나는 오직 그들이 참으로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뿐이다.


나는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의 사고 회로가 이해가 잘 안 된다.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혀서 쉴 새 없이 떠드는 것으로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들은 현재의 삶에 만족하기 못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기억력은 원래 선택적으로 정보를 수집하기 때문에, 나에게 유리한 기억들이 나의 뇌에 저장된다. 그 당시에는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다고 해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부정적인 감정은 옅어지고 기억은 선별적으로 남아있게 된다. 우리의 기억은 왜곡될 수 있다.


나는 이런 자기 과시형의 사람들을 볼 때면, 본인이 스스로 선택한 위험의 결과를 왜 다른 사람로부터 인정받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게다가 이들의 인정 욕구는 좀처럼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엄마, 아빠가 아닌 직장 동료인 우리들은 절대로 채워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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