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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ing Ko Oct 27. 2019

나는 신이 싫다

하느님인지 나발인지 하는 놈

어렸을 때부터 나는 '신'이라는 존재를 부정했다. 심히 중 2 병스러운 발상일지는 모르겠지만, 도대체 신을 왜 믿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칠렐레 팔렐레 학교 교문을 나서면 어김없이 교회에서 전도 나온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초등학생들을 붙잡고 일장연설을 해댔다. '하느님 믿으면 천국 간다.' '신이 우리를 창조했다.' 면서 집 가고 싶은 학생들 귓구멍에 끊임없이 그들의 교리를 주입했다. 솔직히 초등학생들이 뭘 알겠냐만은 그들은 지조 있게 신념을 전파했다. 그러면서 항상 말의 끝에는 은근슬쩍 '우리 교회 한 번 나와봐요.'를 덧붙였다. 귀 얇은 초등학생들을 꼬시려고 '이번 주 토요일에 떡볶이 파티하니까 꼭  나와요~' 라면서 종이에 이름과 나이와 집 전화번호를 적어갔다. 그때 당시에는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라, 당연스레 집 전화번호를 적어줬고, 토요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우리 집 전화벨을 울려댔다.


어린 마음에 딱 한 번, 교회에 나간 적이 있었다. 만날 학교 앞에서 그렇게 홍보하기도 했고, 공짜 떡볶이 한 번 먹어보자고 난생처음 교회에 갔다. 떡볶이는 개뿔, 예배가 끝나야 준다면서 멋모르고 교회에 온 초등학생들을 몇 시간 동안 예배당에 가둬놓았다. 강단 앞에 서있는 목사는 주야장천 '하느님이 어쩌고 저쩌고~'를 늘어놓으면서 말 끝마다 '아멘-'을 종용했다. 주변 사람들은 뭐에 홀린 것처럼 울면서 '아멘-'이라고 중얼거렸고, 목사는 마치 한 종교의 교주처럼 뭐에 홀린 것처럼 중얼중얼 읊조렸다. 밑도 끝도 없이 몰아닥치는 설교의 파도가 끝나고서, 멍해진 정신으로 예배당을 나와 받은 것은 다 식어 빠져서 흐느적거리는 떡볶이 한 컵이었다. 떡볶이 파티의 '파티'는 어디 가고 학교 앞 분식집에서나 줄 법한 500원짜리 컵떡볶이를 주는 걸까. 저기 예배당 안에서 아무것도 못 하고 몇 시간을 갇혀있던 보상으로는 너무도 형편없는 떡볶이였다. 나는 그 날부터 하느님인지 뭔지 하는 놈 싫어졌다.

나이를 먹고, 성인이 되어서도 하느님을 믿으라는 권유는 끊이지를 않았다. 지하철역을 지나가다가도, '설문조사 좀 해주세요~'라면서 내 팔목을 끌고 가 스티커를 쥐어주고선, '성경을 읽으면 천국에 간다.'라는 누가 봐도 의도가 뻔히 보이는 질문에 '네', '아니오'를 강요했다. 옆에서는 '성경이 어쩌고 저쩌고~' '천국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갈 길 바쁜 내 발목을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한 번은 "아, 저는 불교 신자라서 하느님을 안 믿습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굳이 입씨름하기도 싫고, 듣기도 싫은 천국 타령을 10분 동안 들을 자신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름 현명한 대답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전도 나온 독실한 기독교 신자님들은 타 종교에 대한 존중은 어디에 팔아먹었는지, 굴하지 않고 천국행 티켓을 홍보했다.

 "아이, 하느님 한 번 믿어보세요. 자, 우리는 살면서 죄를 치릅니다. 이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기 위해 하느님을 믿는 거예요. 하느님을 믿으면 천국을 가는 것이고,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가는 겁니다. 자, 요 그림 보세요..."

애당초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지하철에서 파는 잡상인들처럼 팔아먹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종교는 어쩌면 천 원짜리 장난감만도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비단, 이런 사람들 때문에 내가 신을 믿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제발 이번 시험 잘 보게 해 주세요. 어디에 취직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라면서 무엇인가를 간절히 바랄 때가 있지 않던가. 나 역시 그랬다. 이번 수능 시험 잘 보게 해 주세요, 원하는 대학 붙게 해 주세요 라면서 끊임없이 자기 암시를 걸고, 그때만큼은 정말 간절히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에게 빌었다. 하지만 정말 냉정하게도 그런 소원은 기각당했다. 그럴 때마다 '신은 그런 사소한 소원을 들어주는 대상이 아니다. 네가 그렇게 실패한 것 또한 신의 뜻이고, 의지이다.'라면서 간절히 기도한 사람을 바보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해했다. 나는 본래 기독교 신자도 아니고, 남들이 교회에서 투자한 시간에 비하면 뭔가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실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남들보다 열심히 노력해서 무언가를 얻어내도 그 또한 신의 뜻이라는 것에 화가 났다. 네가 열심히 노력한 만큼 그 간절함이 닿은 것이라며 내 노력을 폄하했다. 이뤄달라 할 때는 본체만체 했으면서, 이제 와서는  "나는 전지전능하다."라고 말하는 게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나와 달리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시다. 매주 일요일이면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리고, 성경책을 품에 안고 다니신다.


"엄마, 거기 교회 간다고 뭐가 바뀌기는 해요?"

"뭐 바뀐다고 가겠니, 그냥 가는 거지."

"아니, 뭐 교회 다니면서 내가 행복해졌다든지, 삶이 윤택해졌다든지, 최소한 내가 먹고살만해져야 다니는 거 아니에요? 백날 천날 나가봐야 돈 없어서 먹고살기도 바쁜데 하느님인지 뭔지한테 기도는 왜 하는 건데요?"

"야! 다 내가 뜻이 있고, 이유가 있는 거야!"

"뭔 하느님이라는 새끼가 대책이 없어. 고작 해봐야 뒤져서 천국 간다고 약이나 존나게 팔아제끼기나 하고. 지금 행복하자고 열심히 살고, 아침에 알람 소리 듣고 일어나서 일 나가지, 뒤져서 행복해서 뭐 해?"

"말을 왜 또 그렇게 하니?"

"틀린 말도 아니잖아요? 믿으면 다 행복해지고, 좋아지는 거 아니었어요? 그렇게 열심히 신앙심으로 모시고 있는데 우리 꼴은 이게 뭐냐고. 돈 있는 새끼들은 있는 대로 다 헤쳐먹고, 우리 같이 가난한 새끼들은 평생 이렇게 사는데, 하느님한테 백날 가서 기도 박아봐야 뭐하냐니까? 대체 신이라는 새끼가 해주는 게 뭔데? 내가 열심히 살았으니까 이렇게 사는 거지. 손 놓고 하느님한테 기도한다고 뭐가 바뀌긴 해요?"


어머니에 대한 불만이라기보다는, 신에 대한 원망을 속사포처럼 뱉어냈다. 단 한 번도 신은 우리 편이었던 적이 없다. 집이 망할 때도, 어머니가 사는 게 힘들다고 울면서 얘기할 때도, 나는 마음 깊은 곳에 처박힌 신을 붙잡고 '제발 잘 살게 해 달라'라고 빌었다. 이렇게 열심히, 성실히 살아온 우리를 봐서라도 지금보다는 잘 살게 해 달라고 아니 그냥 남들처럼 평범하게만 살게 해달라고 수없이 빌었다. 하지만 신인지 뭔지 하는 새끼는 산타마리아의 미소를 지으며 그 소원을 기각했다.


나는 신이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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