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조차 못 한 순간, 꾸준한 러닝이 빛났다
강의실에 들어서는 데 뭔가가 허전했다. 등허리에서 진땀이 방울방울 맺힌다. 아뿔싸. 강의 파일! 휘청이는 정신머리를 붙잡으며 강단에 섰다. 학생들에게 인사를 건넴과 동시에 사과부터 한다. 5분만 기다려 달라고 간곡히 요청하고는 출석 체크 프로그램을 켜 둔 채 강의실을 벗어난다.
강의 초반에는 USB를 사용해 강의자료를 가지고 다녔었다. 여러 사람이 사용하는 PC 특성상 바이러스로부터 자유롭지 않았고, 어느 날 USB의 모든 자료가 공중분해되는 사태를 경험한 이후로 조금 귀찮더라도 이메일을 사용하고 있다. 카카오톡 나에게 보내기의 메일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강의 직전에 강의 파일을 메일로 첨부해 보내두고 강의실에 도착해서 메일을 열어 파일을 다운로드하면 끝. 그런데 오늘, 그 중요하고도 반복적인 과정을 빼먹은 것이다. 분명 강의실 출발 전 화장실에 들를 때까지만 해도 생각하고 있었거늘, 손을 씻고 나와 로션을 바르는 동안 까맣게 잊어버렸다. 마치 할 일이 다 끝난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이동 채비를 해서 강의실로 출발해 버렸으니 허전함은 당연한 결과였다.
연구실과 강의실은 바로 옆이긴 해도 길을 하나 건너 건물 간 이동을 해야 해서 움직이는 데 시간이 꽤 소요된다. 학생들이 기다리고 있다. 걸을 수 없는 노릇. 하필이면 7cm 힐을 신고 있었지만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무작정 달렸다. 세상에 내가 이러려고 러닝을 시작한 건 아닌데! 연구실에 들러 메일을 보내고 다시 강의실로 달려가 메일을 여는데 채 5분이 걸리지 않았음을 확인하고는 속으로 웃음이 터졌다. 심지어 미친 듯이 달린 것 치고는 숨이 차지도 않다. 세상에 내가 이러려고 러닝을 시작한 건 아닌데! 꾸준한 러닝의 효과를 이런 식으로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이걸 기뻐해야 하나, 슬퍼해야 하나 난감하다. 웃프다는 표현이 딱 오늘을 두고 쓰라고 생긴 표현이지 싶다.
강의를 끝내고 다시 연구실로 돌아가는 길. 전속력으로 뛰었던 길을 눈으로 되짚으며 시원하게 웃어버렸다. 어쨌든 꾸준히 달리기를 하길 잘했다며 스스로에게 칭찬도 건네본다. 오로지 건강한 체력만 생각했는데 돌발상황에 맞서는 대처능력까지 갖추게 되었다. 뭐가 되었든 좋다. 위기를 웃음으로 넘긴 내가 일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