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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실물: 끝나지 않은 밤

by 밤비


불투명 유리문 앞에서 경선은 맞잡고 있던 손에 힘을 가득 실었다. 연화 역시 함께 손에 힘을 주는 것으로 경선의 불안에 응답했다. 맞닿은 두 손바닥 사이로 축축한 땀이 배어 나오고 있었으나 그것이 경선의 것인지 연화의 것인지 구분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경선을 대신해 연화가 유리문을 밀었다. 생각보다 가볍게 밀리는 문조차 원망스러운 밤이었다. 체육관 바닥 가득 이름 모를 물건들의 물결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작은 립스틱이나 키링에서부터 핸드폰, 가방, 머플러, 모자, 외투, 그리고 신발까지. 수천 점의 물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하나하나 얇고 투명한 비닐에 싸여 있는 물건들의 형상이 어쩐지 섬뜩하게 느껴져, 연화는 어깨를 한껏 움츠렸다.


"저 ... 부탁드릴 것이 있어요."


연화의 음성이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경선은 그 자리에 가만히 멈춰 서 있었다. 지나친 고요 속에서도 오롯이 느껴지는 감각들이 있었다. 무거운 발걸음 소리와 비명 같은 비닐 소리가 반복적으로 오갔고, 그 사이로 꾹꾹 눌러낸 흐느낌이 바닥을 타고 흐르기를 반복했다. 슬픔도, 분노도, 원망도 무엇 하나 시원하게 터트리지 못한 감정들이 공기 중에 떠다녔다.




경선은 빌고 또 빌었다. 부디 아무것도 찾을 수 없기를. 유실물 목록에 딸 아이의 흔적이 티끌이라도 남아있지 않기를. 현장에도, 인근 병원에도 딸 아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곳에서조차 흔적을 찾을 수 없다면 차라리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딸이 매일같이 오다녔을 그 길. 편의점 아르바이트가 끝나자마자 눅진해진 몸을 이끌고 다음 아르바이트를 위해 애써 씩씩하게 걸었을 그 골목길. 화려한 네온사인 아래 붉게 물들었을 참혹한 밤, 어쩌면 지우는 전혀 다른 골목이나 실내에서 안전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싶었다. 갑자기 핸드폰을 잃어버렸을 수도 있고, 친구들의 죽음을 애도하느라 정신없을 수도 있다는 터무니없는 상상들이 옅은 꼬리를 이었다. 제발 살아만 있어, 간절한 외침이 목구멍을 간질였다. 그때였다. '나야.' 어깨에 연화의 손이 닿았다. 라텍스 장갑의 고무 냄새가 코끝에 훅 끼쳤다. 경선은 깊은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호흡을 가다듬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날 오전에 지우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사진에서 보이는 물건들과 비슷해 보이는 건 다 추렸어. 천천히, 하나씩 설명해 줄게. 조금이라도 비슷한 물건이 있으면 말해줘. 직접 만져볼 수 있게 꺼내줄 수 있어."


연화는 하나씩 물건들의 종류와 특징을 읊었다. 경선은 입술을 꽉 깨물고 연화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그것은 기필코 딸의 흔적을 찾아내겠다는 결연한 의지 같기도, 어떡해서든 딸의 흔적은 찾지 않겠다는 확고한 고집 같기도 했다.


"여기 ... 머리끈이 하나 있어. 붉은색 꽃 한 송이, 그 주위로 작은 구슬 두 개씩. 지우가 늘 팔목에 걸고 다니던 거랑 비슷해. 만져볼래?"


연화는 경선의 손바닥 위에 머리끈을 올려주었다. 경선은 자신의 손가락들 더듬듯 천천히 움직였다. 꽃잎과 구슬을 한참 동안 만지작거리던 경선은 힘들게 입을 뗐다.


"... 잘 모르겠어. 구슬에 흠집이 좀 있었던 것 같은데 이건, 너무 매끈하지 않니."


담담한 표정과 달리 불안정한 음성이 여러 갈래로 흩어졌다. 연화는 가늘게 떨리는 경선의 손끝에서 머리끈을 돌려받으며 입을 다물었다. 말을 아껴야 했다. 제 눈 앞에 보이는 것들을 그대로 다 읊고 싶었지만, 그건 사실 물건들을 보며 자신이 해석하고 느낀 모든 것이 포함된 말이었다. 그저 한 대의 cctv처럼 감정을 빼고 관찰한 내용만을 전달해야 했다. 판단은 자신이 아니라 경선의 몫으로 남겨야 했다. 그래야 끝나는 싸움이었다.




보라색 스티커로 꾸민 에어팟, 세 개의 리본이 나란히 묶여있는 검은색 스니커즈 한 켤레 ... 지우의 것과 닮은 물건들이 차례로 경선의 손에 닿았다. 경선은 거듭 고개를 저었다. '이건 너무 흔한 거잖아', '신발 사이즈 한 번 더 확인해 봤어?' 이런저런 이유들이 덕지덕지 따라붙었다. 마지막으로 한쪽 귀가 미세하게 뜯어진 토끼 인형 키링이 손 위에 올려졌을 때 결국 경선은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손끝에 닿는 복슬한 털의 질감, 귀퉁이에서 느껴지는 거친 실밥의 감촉은 오직 경선에게만 보이는 세계였다. 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귀 하나가 찢어져 미운 실밥이 튀어나왔지만, 지우는 그걸 고치기보다 '이게 곧 얘의 상징이잖아, 엄마.'라며 사랑스럽게 그 자리를 매만지곤 했다. 지우의 햇살 같은 웃음소리가, 보드라운 볼살의 감촉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 경선은 서둘러 제 입을 틀어막았다. 체육관을 서성이는 다른 이들처럼, 한껏 억누른 슬픔이 입술 사이로 미약하게 비집고 흘러나왔다.


"지우 ... 우리 지우 ... 지우가 ..."


연화는 라텍스 장갑을 벗어던지고 잔뜩 웅크린 경선을 품에 안았다. 경선의 신음 같은 말소리는 그 어떤 비명보다 소슬했다. 연화는 연신 경선의 어깨를, 등허리를 쓰다듬었다. 토끼 인형 위로 경선의 품이, 경선 위로 연화의 품이 겹겹이 쌓여 둥글게 몸집을 부풀렸다. 늘 지우를 안전히 지키고 싶었던 두 사람의 온기가 방패처럼, 방공호처럼 단단하게 쌓여갔다. 날 선 원망과 후회가 폭풍처럼 밀려왔다. 경선은 거듭 호흡을 가다듬었다. 터지지 않는 울음이 한이 되어 이슬처럼 맺혔다. 복부 깊은 곳에서 짓눌린 한숨만이 겨우 입 밖으로 튀어나올 뿐이었다.


"이게 지우는 아니잖아. 우리 지우, 아직 못 만났잖아. 그냥 ... 우연히 잃어버린 거면 어떡해? 지우가 맨날 다니는 길이니까, 그러니까 ..."


연화는 침묵을 택했다. 그녀 역시 무엇도 단정 지을 수 없었다. 속 시원히 작별이나 애도 같은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감정의 둑이 조용 차오르는 것을 목도할 뿐이었다. 지우의 생(生)이기도, 사(死)이기도 한 모든 가능성이 다시끔 여러 개의 점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연화야. 모르겠어. 나 이거 ... 너무 무거워."


경선은 이내 토끼 인형을 앞으로 내밀었다. 연화는 그것을 받아 다시 비닐 안에 봉했다. 멍하니 허공을 향한 경선의 눈길은 마치 무언가를 강렬히 응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늘을 향해 열린 경선의 두 손바닥에는 아직도 인형의 감촉이, 딸 아이의 온기가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있잖아."

"..."

"지우는 아직, 어딘가에 있는 거 아닐까."


경선의 말은 질문이라기보다는 확신이었고, 그녀의 목소리는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가 되어 체육관 속으로 천천히 흩어졌다. 그 밤. 누군가를 떠나보내지도, 되돌려 받지도 못한 사람들의 발걸음은 계속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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