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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불나방 01화

불나방 1화: 지후 형

by 밤비


시작은 단순했다. 무신경하게 귀 뒤로 꽂은 머리칼, 왼쪽 귀에만 박혀있는 검은색 피어싱, 심오한 사연이 있어 보이는 눈빛까지. 한 번 시선이 꽂히면 돌이킬 수 없었다. 지후 형은 우리 모두의 아이돌이었다.


모든 것은 형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형이 담배 한 개피를 꺼내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우기만 해도 주변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말이 필요 없었다. 형의 눈길이 곧 신호였다. 시선이 닿는 순간 주머니에서 공굴리던 라이터가 주인공처럼 재빠르게 튀어나왔다. 담뱃불이 붉게 번지고 희뿌연 연기가 꽃피면 형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군더더기 없는, 가볍고 깔끔한 몸짓이었다. 형의 손목 안쪽에 옅게 새겨진 타투 하나에도 온 시선이 숨죽여 일렁이는 게 느껴졌다. 새겨진 무늬가 무얼 의미하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따라 그리고 싶어 하는 애들이 즐비했다. 형이 입은 거라면 그게 헐렁한 교복이든 목이 늘어난 티셔츠든 아무 상관이 없었다. 똑같은 디자인의 옷도 형이 입는 순간 전혀 다른 어떤 것이 되었다. 마치 옷이 형을 입은 것만 같았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모두의 시선은 늘 형을 향했다. 눈길 하나, 농담 하나에 무리가 한 몸처럼 움직였다. 누구든 ‘형’이라고 하면 그건 곧 지후 형을 뜻하는 것이었다. 다른 이름은 필요 없었다. 형이 가진 것이라면 무엇이든 절대적인 힘 같은 게 깃들어 있었다. 그 힘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 건지 궁금했지만 누구도 따져 묻지 않았다. 그저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에서 그 빛을 쬐고 싶어 했다. 나도 다를 바 없었다.


밤이고 낮이고 가리지 않았다. 형이 속한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면 못 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 무작정 따라다녔다. 기껏해야 형이 자주 출몰한다고 소문난 태영 광장 근처를 자주 어슬렁거리는 게 전부였지만, 그마저도 내게는 가장 중요한 하루 일과였다. 저만치서 형의 실루엣이 보이면 뜀박질하고 싶은 두 발을 꾹꾹 누르며 그림자처럼 거리를 좁혔다. 형과 가까워지고 싶어 안달 났다거나 부러 따라다녔다는 뉘앙스를 풍기지 않으려 무던히 노력했다. 가깝지도, 멀리도 않은 적당한 거리에서 내가 차지할 수 있는 크기의 부피감만큼 존재하고 싶었다. 사소한 행동거지 하나도 조심스러웠다. 형의 눈 밖에 나고 싶지 않은 마음과 형의 시선을 사로잡고 싶은 마음이 자꾸만 뒤엉켰다. “뭐. 또 너냐.” 퉁명하게 내리꽂는 인사말에도 가로로 길게 늘어졌을 입술. 숨길 수 없는 마음도 있는 법이었다.


세 달쯤 지났을까, 작전을 바꿨다. 너도나도 엉겨 붙는 낮보다는 밤을 공략하는 편이 더 효율적이었다. 할 일 없는 밝은 낮에는 두터운 이불 속에 들어가 에너지를 비축했다. 긴긴 낮잠을 자다가 땅거미가 내려앉으면 느긋하게 눈꺼풀을 열었다. 어둑해진 하늘을 바라보며 라면이나 맨밥으로 첫 끼를 대충 때웠다. 하루에 겨우, 휑한 그 한 끼가 식사의 전부였지만 조금도 허기지지 않았다. 자정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열다섯. 마치 정해진 수순처럼, 당연한 유행처럼 아이들이 망가지고 부서졌다. 도미노처럼 사춘기를 핑계 삼아 거친 언행을 일삼는 애들이 하나 둘 늘고 있었다. 그러나 하루가 멀다하고 매일 새벽마다 외출을 감행할 만큼 무모한 애들은 드물었다. 제멋대로 삐딱선을 타는 와중에도 다들 보이지 않는 어떤 경계에 공고히 둘러싸인 것 같았다. 투명한 결계. 내가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울타리였다. 여느 애들과 나는 좀 달랐다. 내게는 이유 불문, 안부는커녕 사소한 행선지조차 묻는 어른이 없었다. 누구도 나를 궁금해 하지 않았다.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도 아는 이가 없는 것만 같았다. 애초에 허락한 이도, 거절한 이도 없는 자유로운 삶.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었다. 처음부터 갖지 않았던 것에 대해 할 수 있는 거라곤 비루한 상상이 전부일 테니까. 자정이다. 신발을 고쳐 신고 현관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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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