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내 생각이 짧았던 건가. 내가 놓친 게 있나. 아니면 너무 단순하게 접근했나. 바이크만 있으면 끝일 줄 알았다. 물론 형이 아무나 덥석 받아주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말이다. 태영 광장에서 짬밥 좀 차고 안면 튼 애들이 하나 둘 바이크를 마련하고 행렬에 합류하는 걸 분명 봤다. 나도 이만하면 된 거 아닌가 싶었는데. 현실의 벽은 높았다. 입 안이 쓰다.
죄 없는 빈 깡통만 거듭 걷어찼다. 좁은 집 안 가득 깡통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이럴 때 보통은 뭐라고 하나? 아니면 그냥 두나? 모르겠다. 집은 언제나 비어있었다. 오래 전에 사라진 엄마는 아예 기억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아빠는 대부분의 시간을 바다 위에서 보낸다. 냉장고에는 푹 익다 못해 뭉개진 김치와 장아찌가 뒹굴었고, 찬장에는 라면과 조미김, 햇반이 조촐하게 채워져 있었다. 이런 집 안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랄 건 딱히 없었다. 지금처럼 깡통 소리나 이웃집 텔레비전 소리가 전부면 말 다 한 거 아닌가. 하. 집이 이 모양 이 꼴이면 다른 데서라도 좀 그럴 듯하면 안 되는 건가.
답답했다. 이대로 포기해버리긴 너무 아깝다. 머리에 이고 다닐 것도 아니고, 저 바이크를 어떻게든 굴려야 속이 풀리겠다. 무작정 키를 챙겨들고 현관을 나섰다. 주머니에서 빠져나온 병아리가 달랑거리며 따라붙었다.
밤 10시. 공기가 차갑다. 그래봤자 보일러 꺼진 집 안이나 바람 부는 집 밖이나 큰 차이는 없다. 오히려 달리면 좀 더 괜찮아질 터였다. 헬멧을 고쳐 쓰고 시트에 앉았다. 키를 꽂고 흔들자 이내 웅웅웅, 뜨거운 엔진 소리가 울렸다. 괜히 올라가는 입꼬리를 조용히 끌어내리며 두 발을 올렸다. 몇 날 며칠 땀 흘리며 연습한 보람이 있다.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 모아 산 바이크인데, 시동까지 온전히 내 힘으로 붙여야만 진짜다. 지후 형한테 부끄럽지 않으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한다.
미끄러지듯, 유유히 태영 광장에 들어섰다. 헬멧 속에서 형을 찾느라 열심히 두 눈을 굴리다가 하마터면 넘어질 뻔 했다. 형은 아직이다. 형이 없어서 다행인지, 아니면 아쉬운 건지 알 수 없다. 천천히 광장 오른편으로 핸들을 꺾었다. 헬멧을 벗지도 않았는데, 저만치서 껄렁한 애들 몇몇이 나를 주시하는 게 느껴졌다. 내 얼굴보다 바이크가 먼저 시선을 먹어치운 게 분명했다. 화려한 LED 불빛이 제 몫을 충분히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저만치서 들으라는 듯 수군거리는 소리가 점차 몸집을 부풀렸다. 아까 그 애들이다. ‘야, 전에 쩔쩔 매는 거 지후 형이 시동 걸어줬다던데?’ 간사한 웃음소리가 뒤따른다. ‘시발, 저 새끼 졸라 질질 짠 거 아니냐?’ 하, 별 게 다. 두 손에 힘이 들어가는데 연신 다른 목소리도 기어 나왔다. ‘노력이 가상하다, 가상해’, ‘근데 쟤 어디 출신이냐? 맨날 알짱대’ 뭐 하나 틈만 보이면 소금 문지르며 축제할 인간들, 토악질이 나오는 걸 겨우 참았다. 참자. 여러 번 겪어봐서 안다. 저런 되도 않은 시비에는 대꾸하지 않는 게 상책이다. 게다가 오늘은, 적어도 오늘만큼은 당당하게 태영 광장에 내 자리 하나 꿰차고 싶었다. 묵묵히 광장 오른편 구석에 바이크를 멈춰 세웠다. 시트에 걸터앉아 허리를 곧게 폈다. 어깨 위로 LED 불빛이 날개 돋힌 듯 불꽃처럼 일렁였다.
바로 그 때였다. 숨을 고를 틈도 없이 광장 한 쪽에서 우당탕!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또 이지랄이네! 폐차 고고? 포기해라, 임마.’ 상스러운 조롱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