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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불나방 03화

불나방 3화: 지각변동

by 밤비


본격적으로 겨울이 시작되면서 영하로 떨어진 기온이 무색하리만큼 태영 광장의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그 무렵부터 지후 형은 소란스러운 굉음과 함께 등장했다. 저 멀리서부터 땅을 울리는 소음이 낮게 깔리면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서늘한 겨울밤 공기를 가르며 짐승처럼 울부짖는 굉음은 눈발처럼 흩날리던 우리의 잡담을 단숨에 집어삼켰다. 반짝이는 붉은 바이크에 앉은 형의 모습은 거친 야생마를 길들인 용맹한 전사 같았다. 그 어떤 네온사인보다 화려하고 강렬한 빛줄기가 되어 밤거리를 장악했다. 모든 것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치밀하게 조각된 피조물 같았다. 그릉거리는 바이크 위에 앉아 헬멧을 벗는 장면은 그 자체로 완벽한 청춘 영화의 엔딩 같았다. 바람결에 흩날리는 젖은 머리칼, 옅게 흩어지는 입김, 보일 듯 말 듯 빛이 반사되는 검은 피어싱.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그리고 그것은 거대한 지각변동의 서막이었다.


광장의 아이들이 이리저리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무리는 둘로 나뉘었다. 바이크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보이지 않는 선은 점점 더 명징하게 두각을 드러냈다. 어떤 식으로든 도태되고 싶지 않은 아이들은 지후 형과 다른 형들의 눈치를 보며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누군가의 오토바이 뒷자리에 잠시라도 엉덩이를 붙이고 싶어 안달 난 하이에나 무리 같았다. 사실 누군가의 뒷자리에 올라타는 일조차 치열한 서열 싸움이었고 잡음이 끊이질 않았다.


내게는 그런 싸움의 기회조차 잘 오지 않았다. 형이 이끄는 오토바이 무리가 떠나고 나면, 아스라이 굉음이 사라진 광장에 나 홀로 남아 정적을 지켰다. 기다리면, 형은 반드시 돌아올 테니까. 언젠가는 내 차례가 올 거라 믿었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면, 내 작은 몸 하나 기댈 자리가 어쩌다 한 번쯤은 생길지도 모를 일이었다.


간택받기 위해 굽신거리는 자신이 치졸하고 부끄럽다고 느낀 아이들은 결국 제 영역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너도나도 바이크를 마련하기 위한 분주한 움직임이 이어졌다. 새 물건을 구매하거나 중고 거래를 하는 건 그나마 얌전한 방식이었고, 대부분은 출처가 불명확한 물건들이었다. 우리들 사이에서 중요한 건 보험이나 면허 따위가 아니었다. ‘내 것’이 있느냐 없느냐, 그것이 전부였다. 배달통이 달린 허름한 바이크라도 제 것이 있으면 당당히 행렬에 합류할 기회가 주어졌다.


나는 아직 아무것도 없었다. 형의 질주 대열에 합류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려면 뭐든 해야 했다. 나도 그 굉음 행렬에 녹아들고 싶었다. 형의 세계와 나의 세계를 가로막고 있는 선을 넘어서고 싶었다.


혹시 몰라 온 집안을 다 뒤졌지만 엉킨 머리카락 뭉치나 말라붙은 바퀴벌레 시체가 전부였다. 결국 서랍장 제일 아래 칸에 손을 댔다. 마지막 저금통이었다. 이것마저 깨고 나면 한동안은 한 끼 식사조차도 지켜내기 어려울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 것도 잠시, 본능처럼 손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손바닥만 한 돼지 저금통의 배가 힘없이 쩍 갈라졌다. 구겨진 지폐와 크고 작은 동전들이 보잘것 없이 와르르 쏟아졌다. 작은 방 여기저기로 흩어져 구르기 시작한 동전을 두 손으로 쓸어 담았다. 한참을 세고 또 셌다. 17만 9천 남짓. 액수 대부분이 동전인 내 전 재산의 무게는 지나치게 무거웠고 또 지나치게 미약했다.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 번듯한 바이크를 마련하기에는 한참 모자란 액수였다. 중고 거래 앱을 열었다. 일주일 내내 수십 개의 글을 읽고 또 읽었다. 거래되는 바이크는 여럿이었지만 내가 가진 액수로 거래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새끼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스크롤을 끝없이 올렸다. 제발, 하나만. 바로 그 때였다. 화려한 LED 불빛으로 치장한 튜닝 바이크 한 대. 20만 원. 모자란 액수는 전단지 알바 사장님께 가불 하면 충분할 터였다. 채팅을 누르는 손 끝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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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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