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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불나방 04화

불나방 4화: 시동

by 밤비


중고 거래 앱으로 채팅을 걸자마자 시간과 장소를 알리는 단출한 글자 몇 개만 찍혔다. 거래 장소는 태영 광장 뒤편 중국집 골목이었다. 어쩐지 춘장 냄새가 건물 틈새까지 놓치지 않고 잔뜩 베어든 것 같아 웬만하면 잘 지나는 골목이 아니었다. 오늘도 역시나 퀘퀘하고도 달큰한 내음이 진동하는 걸 느끼며 마스크를 코끝까지 단단히 덮었다. 밤 10시. 평소보다 고작 몇 시간 일찍 일어났을 뿐인데 눅진한 피로가 눈꺼풀에 들러붙었다. 골목 안, 검은 패딩을 발견하고는 잔뜩 굽었던 어깨를 폈다. 쫄지 마, 죄 지었냐.


가슴에 맨 손바닥만 한 크기의 크로스백을 고쳐 맸다. 걸음마다 동전 소리가 짤랑짤랑, 눈치 없이 크게 흔들리는 것만 같아 괜스레 얼굴이 붉어졌다. 저금통에서 튀어나온 17만 9천 원 중 구겨진 천 원짜리 지폐 여덟 장을 제외한 나머지 액수는 모두 동전이었다. 전단지 알바 사장님께 가불해 받은 3만 원만이 외따로 빳빳한 질감을 뽐냈다. 마련한 돈을 흰 종이봉투에 챙겨 넣었지만 동전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자꾸만 찢어지고 구겨졌다. 어쩔 수 없이 검은 봉지에 돈을 쑤셔 넣다시피 하고서야 집을 나섰다.


붉은 중국집 불빛이 낯선 얼굴 위로 어른거렸다. 대략 스무 살은 되었을까. 후줄근한 슬리퍼와 무릎이 잔뜩 늘어난 트레이닝 바지, 헝클어진 머리칼. 유심히 살펴보아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내심 태영 광장 멤버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믿을 만한 사람인가 망설이는 동안 크로스백을 쥔 오른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를 발견하자마자 그는 짧게 턱짓으로 바이크를 가리켰다. 골목 구석에 세워진 바이크는 사진으로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하게 보였다. 아직 시동을 걸기도 전인데, 검은 차체에 덕지덕지 붙여둔 LED 전구들이 벌써부터 무지개 빛으로 번쩍이는 것만 같았다.


“야, 돈부터.”


다짜고짜 반말이었지만 따져 묻지 않았다. 고분고분 크로스백을 열었다. 바스락거리는 비닐 소리를 의아해하던 상대는 이내 상황을 파악하고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내 손을 내려다봤다. 그는 봉투 안의 액수를 제대로 세어보려다 말고 패딩 주머니에 푹 쑤셔 넣었다.


“20만 원 진짜 맞아요. 여러 번 확인했어요.”


내가 작게 중얼거렸지만, 그는 듣는 둥 마는 둥,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다. 거래는 어이없을 만큼 싱겁게 끝났다. 누렇게 때가 탄 병아리 키링이 그의 손에서 내 손으로 넘어오는 순간, 나도 모르게 두 손 가득 힘이 들어갔다.


핸드폰에 얼굴을 박은 채 상대가 골목을 완전히 떠나고서야 비로소 편안하게 숨을 내쉬었다. 마스크를 턱 밑으로 내리고, 인중에 맺힌 땀을 소매로 훔쳐냈다. 검은 봉지의 무게만큼이나 어깨를 짓누르던 긴장이 한순간 풀리는 게 느껴졌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군데군데 긁힌 자국이나 녹슨 흔적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바퀴에는 오래된 기름때가 껴 있었고, 머플러에는 미세한 금도 가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지금 내 손에 열쇠가 있다. 전 재산을 털어 마련한 내 바이크가 눈앞에 있다.


시트에 올라앉으니 덩치 큰 차체가 꽤 버겁게 느껴졌다. 균형이나 잡을 수 있을까, 제자리에서 시트에 엉덩이를 붙였다 떼기를 몇 차례. 마침내 다짐하듯 두 손을 핸들에 올렸다. 열쇠를 꽂고 시동을 걸 차례였다.




... 어라.


차가운 쇳소리만 덜컥거릴 뿐, 엔진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병아리 키링이 농락하듯 이리저리 흔들렸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눈물이 맺힐 것 같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발로 몇 번이고 킥을 내리쳤다. 다시, 또 다시. 수차례 시도해도 결과는 같았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손바닥에 땀이 흥건히 배었다. 제발, 제발.


“야, 너 뭐 하냐.”


불쑥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 하나가 떨어졌다. 지후 형이었다. 형은 갈색 가죽점퍼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골목 입구에 비스듬히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물쭈물하는 사이 형은 성큼성큼 곁으로 다가와 내 어깨를 툭 쳤다. 반사적으로 일어난 내게서 키를 건네받은 형은 자연스레 자리에 앉아 열쇠를 다시 꽂았다. 어느 것 하나 거리낌 없는 매끄러운 움직임이었다. 열쇠를 비틀고 발로 킥스타트를 강하게 차 올리자 “그릉!” 엔진이 반응했다. 죽은 것만 같던 LED 불빛들이 단숨에 살아나 위세를 뽐내듯 번쩍였다. 무심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지후 형이 나를 위아래로 천천히 훑었다.


“헬멧은 있냐?”


비아냥인지, 걱정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말투였다.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괜히 입꼬리가 비틀렸다. 형의 말이 은근한 허락처럼 들렸다. 착각이어도 어쩔 수 없었다. 방금 걸린 시동처럼 심장이 누구보다도 요란하게, 큰 소리로 고동치고 있었다. 처음으로 형의 세계에 제대로 발을 내디딘 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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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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