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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불나방 02화

불나방 2화: 나의 세계

by 밤비


시침과 분침이 일직선으로 만난 자정, 12시. 분침이 비스듬히 오른켠으로 빗겨나가는 순간부터 나의 새벽이 열렸다. 공기의 질감과 온도부터가 전연 다른 세계. 희뿌연 담배연기 같은 입김이 공기를 갈랐다. 태영 광장은 언제나 같은 모습이었지만, 어두운 밤이면 완전히 다른 공간이 되었다. 네온사인 불빛은 누가 더 화려한 지 내기라도 하듯 자극적으로 번쩍이기 바빴고, 치킨집 환풍구에서 흘러나온 기름내와 여기저기 흩뿌려진 알코올 냄새가 고약하게 엉켰다. 발에 채인 빈 소주병이 달그락거리며 굴러다녔고, 휴대용 블루투스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어설픈 음악소리가 밤 공기를 찢었다. 그야말로 별천지가 따로 없었다.


확실히 낮보다는 훨씬 적은 머릿수를 보며 안도했다. 다들 형을 기다리는 눈치였지만 저마다 의미 없는 행동을 이어가며 시간을 죽이기 바빴다. 휴대폰 불빛에 얼굴을 묻은 아이, 배달 가방을 베개 삼아 누운 아이, 불붙은 담배를 입에 물지도 않고 허공에 욕설만 흩뿌리는 무리 ... 그러다 형이 나타나면 모든 소란은 단숨에 가라앉았다. 정적 끝에 형이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으면 다시 멈춰있던 세계가 천천히 움직였다.


새벽, 나의 세계는 지후 형으로 완성됐다. 화려한 네온사인이 있었고, 공허하고도 느슨한 분위기가 자욱했으며, 형의 나른한 눈빛이 함께였다. 어디에 서 있건 형은 무대 위 주인공 같았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오늘은 조금 더 용기를 내어 걸음을 뗐다. 노란 가로등 불빛에 길게 늘어진 형의 그림자에라도 가까이 닿기만을 바랐다. 형의 그림자 곁이라면 나라는 존재도 조금은 선명해지는 것 같았으니까. 그 사실 하나만으로 공기가 더워졌다. 태영 광장의 소음은 나를 삼키는 동시에 살려냈다. 낮에는 한없이 지워지기만 하던 남루한 내가, 밤이면 잠시나마 분명히 존재할 수 있었다.




낮에는 실컷 자고 밤이면 좀비처럼 일어나 거리를 돌아다니기 시작한 지 일주일 쯤 되었을 때였다. 그 날 형의 시선을 느꼈다. 침착하게 라이터를 꺼내 형의 얼굴로 가져갔다. 내 손이 형의 담배 앞에 가 닿는 순간, 구석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이 흘렀다. 다들 알고 있었다. 형의 자리에 감히 끼어들 수 있는 건 선택받은 극소수뿐이라는 걸. 나는 떨리는 손끝을 억눌렀다. 착각이 아니었다. 드디어 내 차례였다.


이상하게 그날따라 한 번에 불이 붙지 않았다. 유난히도 볼품없이 파르르 떨리는 손. 다시끔 숨죽인 웃음소리가 흘렀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시 힘껏 불꽃을 일으켰다. 형이 조금 더 가까이 얼굴을 기울였다. 형과 나 사이 공기의 흐름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질 새라, 숨을 들이마시고 꾹 참았다. 그러는 동안 형의 입김이 바람결에 흘러와 내 귓볼을 타고 스쳤다. 형의 숨결이 지나간 쪽 얼굴이 꼭 불에 데기라도 한 것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부끄러워서 그만, 곧장 죽고 싶어졌다. 형의 시선이 나에게 맺히는 게 느껴졌다. 담뱃불이 붙는 걸 보자마자 얼른 손길을 거두었는데도 평소처럼 뒤로 물러나지 않은 형이 집요하게 나를 비췄다.


“야, 너 이름이 뭐라고 했냐.”


형이 내게 처음으로 말을 붙였다. 아아. 처음이었다. 살면서 내 이름을 궁금해 하는 사람이 또 있었던가. 형의 그 짧은 질문이 나를 세상에 불러냈다.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오직 단 한 사람, 지후 형이 확인해 준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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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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