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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과 모르는 것

매일글쓰기 16일차

by 밤비


우리 가족은 찜질방을 좋아한다. 특유의 뜨겁고 눅진한 그 찜질 자체를 즐긴다기보다는 너른 공용 공간에서 같이 또 따로 시간을 즐기는 여유로움을 애정하는 쪽에 가깝다. 편의점을 들락날락하며 군것질을 자유롭게 하는 것도, 바닷가가 넓게 펼쳐진 경치를 구경하는 것도 한몫한다. (그래서 특정 찜질방 한 곳을 좋아한다.)

늘 공용공간에만 머물렀던 아이가 오늘은 나와 함께 찜질방도 들어갔다. 보석방은 노곤노곤할 정도의 따뜻해서 갑자기 추워진 오늘 날씨에 안성맞춤이었다. 아이와 두런두런 수다를 떨다가 옆 방에 한 번 가 보지 않겠느냐 넌지시 물었다. 바로 옆 방은 소금방, 이곳보다는 온도가 좀 더 높았다. 아이는 망설이다가 대뜸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도전해 보겠다는 뜻이었다.

방 안의 후끈한 열기에 놀란 것도 잠시. 바닥에 몸을 뉘고 나니 처음만큼 뜨겁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자갈처럼 보이는 바닥의 알맹이들과 벽면의 벽돌 모양이 모두 소금이라는 내 설명을 의심하던 아이는 저만치 구석에서 알맹이 하나를 들어 혀 끝을 데어본다. 짭조름한 소금 맛에 화들짝 놀라는 얼굴이 귀여워 웃음이 터진다.

"안녕?"

그때였다. 처음 보는 남자아이 하나가 인사를 건넨다. 물론 내가 아니고 내 아이에게.

"여기 말고 옆에 황토방도 좋아, 나랑 같이 가 볼래?"

역시 아이들이다. 몇 마디 나누지 않았는데 금방 친해졌다. (나중에 들었는데 11살 형이란다.) 아이는 형을 뒤따라 황토방으로 출동한다. 내가 가자고 할 때는 고개를 세차게 휘젓더니, 배신감도 살짝 든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다녀오라는 말을 대신했다. 아이가 수건을 하나 챙겨 비장한 눈빛으로 소금방을 나섰다.

한참이 지나도 아이가 돌아오지 않는다. 몽글몽글 콧잔등에 맺힌 땀을 닦으며 황토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찜질방 내에서 가장 뜨거운 공간. 입구 근처에 작은 그림자 두 개가 보인다. 조용히 곁에 다가가 앉으니 둘의 대화가 한창이다.

"너 수술해 본 적 있어?"

"응, 있어."

"전신 마취는 해봤어?"

"응, 과잉치라고 필요 없는 이빨이 하나 있어서 제거하는 수술을 했어. 전신 마취를 했지~"

전신 마취가 뭐냐는 듯 당황한 아이 대신 내가 대답을 했다. 상대 아이는 너 수술 같은 건 안 해 봤지?라는 뉘앙스로 대화를 이끌어가고 싶었는데, 수술도 했다고 하고 전신 마취도 해 보았다고 하니 적잖이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래, 너희 나이 때는 남들이 못 해 본 그런 경험들도 으스댈 수 있는 강인함이나 멋짐 중 하나 일 수도 있지.' 하는 마음에 귀엽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좀 세 보이고 싶었구나,라고 생각의 매듭을 지으려는데 상대 아이가 대뜸 말을 잇는다.

"나도 종양이 있어서 수술했어."

순간 대답을 잃고 멈췄다. 나 대신 아이가 "아 진짜?" 대수롭지 않게 대화를 이었다. 어제 급식 메뉴로 떡볶이가 나왔어,라고 했을 때와 비슷한 혹은 그보다 더 미지근한 반응이었다. 아이는 종양이 뭔지 모르는 게 분명했다. 제가 한 수술 그 이상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했을 터. 그 순간 숨을 멈추고 당황한 건 나뿐이었다.

대화는 금방 다른 쪽으로 흘렀다. 방금 전 그 대화에서 어찌할 바 몰랐던 것은 오로지 나뿐이었다. 얼마 안 가 뜨거운 온기를 참지 못한 아이는 불쑥 밖으로 자리를 옮겼고, 따라 나가던 상대 아이는 복도에서 제 가족을 만나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멀어지는 상대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내 끝나지 않은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종양 제거 수술이라는 경험이 저 아이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저 아이는 우와! 하는 동경의 찬사를 원했을까, 고생 많았겠네! 같은 위로의 응원을 원했을까. 어쩌면 내 아이가 했던 것처럼 대수롭지 않은 어떤 일상의 대화로 녹일 상대가 필요했던 건 아닐까.

답은 알 수 없다. 다만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간극에 대한 혼자만의 생각이 숙제처럼 남았을 뿐. 무언가를 알고 나면 알기 전으로 결코 돌아갈 수 없다. 무언가를 더 많이 알면 좋을 거라 쉽게 생각하지만 글쎄, 때로는 무언가를 더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지는 않을까. 오늘 그 자리에서만큼은 나보다 내 아이가 더 자연스럽고 단단했다. (게다가 내가 종양에 대해 안다고 하는 것도 정말로, 온전히 아는 것이라고도 할 수 없지 않나.) 짧은 대화였고,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순간이었는데 어쩐지 머릿속이 복잡하다. 곱씹을 것들이 많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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