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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박 Oct 30. 2022

삶의 두께

모순 - 양귀자



모순,

책의 제목처럼 이야기의 구석구석에는 온갖 모순이 가득하다. 부유와 빈곤, 행복과 불행, 삶과 죽음, 현실과 낭만(현실과 허구), 과거와 미래, 계획과 우연과 같은 대립항들이 사람들의 삶 속에 녹아들어 있다. 아마도 삶은 그 모순적인 것들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 것 같다. 그 이야기의 중심에는 그녀, 안진진이 있다.


1 - 삶의 두께, 그녀의 곁에는 일란성쌍둥이인 어머니와 이모가 있다. 너무나도 닮은 그들은 결혼을 기점으로 위아래로 갈라진 두 갈래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어머니는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를 만나 불행과 빈곤의 삶을 따라 아래로 걸어가고 이모는 심심하지만 부유한 이모부를 만나 행복과 풍요의 삶을 따라 위로 걸어간다.


하지만 어머니는 불행의 삶 속에서 그 불행의 가시들을 둥글게 만들기 위해 온갖 책을 읽는다. 삶의 불행을 극복하기 위한 아주 현실적인 책을 말이다. 반대로 그녀의 이모는 행복해 보이는 삶 속에서 공허하게 미끄러지는 삶을 붙잡아 두기 위해 소설과 시를 읽나 보다. 행복과 풍요의 뒤에 숨겨진 그 끝없는 공허를 가슴 한편에 치워두기 위한 아주 낭만적인 책을 말이다.


하지만 왜일까, 불행과 빈곤을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살아가는 어머니를 보면 왠지 모르게 그 어떤 건강함이 느껴지고 행복과 풍요의 틈에서 낭만을 찾는 이모를 보면 그 어떤 상실감이 느껴진다. 그들의 삶의 겉을 보면 어머니의 불행과 이모의 행복을 의심할 수 없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삶의 두께가 전혀 다르다. 이모의 삶의 두께는 너무나도 얇아서 저 너머의 어둠이 당장이라도 그 표피를 뚫고 흘러내릴 것 같지만 어머니의 삶의 두께는 두꺼워서 저 너머에 어둠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오히려 저 삶의 부피를 색으로 표현하면 아마 하얀색에 가까울 것이다.


2 - 세상을 향한 낯설음, 그녀의 곁에는 사랑의 시작과 함께 마주한 세상의 낯설음에 무릎을 꿇은 아버지가 있다. 사랑과 폭력이라는 모순의 사이에서 그는 결국 가족의 품을 떠났고 세상에 대한 모든 기억과 삶을 지속하게 하는 건강을 잃은 채로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사랑을 시작했지만 그것으로 인해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이 송두리째 변해버린 것만 같은 그 느낌, 내가 온전히 살아왔던 세상에 대한 낯설음이 아버지를 변하게 했고 이러한 삶의 모순은 딸인 그녀에게도 이어진다.


사랑에 다가갈수록 세상에 대한 이질감이 엄습하는 모순, 그녀는 결국 사랑의 확인과 함께 무너진다. 이모의 낭만성에 고개를 젓다가도 오히려 그 낭만성에 이끌리는 그녀, 그리고 사랑을 확인하고 그 낭만이 세상에 대한 처절한 낯설음으로 변하는 순간 다시 그 낭만을 증오하는 모순, 이러한 모순은 그 어떤 물리적인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다. 행복을 천천히 뜯어보면 그 이면에 불행이 있을 수도 있지만 분명 행복했던 삶이 어떤 감정이나 사건을 매개로 하여 갑자기 불행으로 변할 수도 있는 것이다.


3 - 위장된 행복, 그녀의 곁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모순적인 두 남자가 있다. 부유한 그 남자는 모든 일상이 계획 속에 있고 그것을 현실에서 무사히 실행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 남자의 계획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의 모든 행동, 심지어는 돌발적인 행동조차도 어쩌면 그의 계획 속에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가난한  또 다른 남자는 즉흥적이고 자유로우며 마치 우연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산이나 들판, 길이라는 우연 속에 피어나는 야생화를 사랑한다. 그녀는 그 남자의 낭만이나 서투름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계획적인 그 남자의 온갖 계획과 일정들이 머릿속에 가득하다면 자유로운 그 남자의 서투른 사랑과 세상에 대한 낭만은 마음속에 가득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계획적이고 부유한 그 남자를 선택한다. 이모의 죽음이 굴곡 없는 삶에 대한 그 어떤 깨달음을 줬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모는 자신의 세상을 저버린 다음날의 아침을 견딜 수 없었고 그녀는 결국 그것을 견디어냈다고 한다. 그녀는 첫 번째 남자와의 사랑에서 그녀에게 없는 것을 찾고자 한다. 두 번째 남자와의 삶 속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그것을 찾고자 한다. 그것이 그녀의 삶에 덕지덕지 붙어있을 행복인 것처럼 보이는 것들인지, 그리고 그것들이 이미 마주한 수많은 불행들로 인해 축 늘어진 저울의 한 부분을 끌어올리기 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그녀는 모순적인 두 남자의 사이에서 위장된 행복을 선택한다.




모순적인 삶의 형태를 낱낱이 살핀 후에, 어떤 사자성어 하나가 문득 떠오른다. 일희일비, 기쁨과 슬픔이 번갈아가며 다가온다는 것이다. 내가 상당 부분 공감하고 이해하는 말이다. 항상 그래왔다. 행복이 손을 내밀면 분명히 언젠가는 불행이 그것을 시기한다. 불행이 발을 걸어 넘어지면 분명 그 앞에서 또 다른 행복이 괜찮냐고 위로를 건넨다. 나에게 있어서 행복과 불행은 그런 것이다. 분명히 반복되는 모순, 파동의 형태를 가지는 그것을 조금 멀리서 바라보면 점점 그 굴곡이 흐려지더니 어느 순간 안정적인 하나의 선이 된다.


 결국 삶의 모순을 인정하고 견디어내야 한다. 행복이 찾아오면 감사할 줄 알아야 하고 불행이 찾아오면 겸허히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조그마한 행복을 크게 느낄 줄 알아야 하고 작은 불행을 그냥 지나치면 안 된다. 큰 행복을 두려워할 줄도 알아야 하고 큰 불행에 무너지지 않을 줄도 알아야 한다. 삶은 모순 그 자체다. 하지만 그 모순이 두려워서, 모든 것을 부술 수 있는 창과 모든 것을 막을 수 있는 방패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해서, 어차피 운명이 삶의 모순을 결정했다고 어림짐작할 필요는 없다. 풍요와 행복과 같은 단어들에 빈곤과 불행이라는 대립항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것들의 무게를 맞출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삶에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모순적인 것들의 반란을 눈여겨보지 못한다면 결국 넘어질 것이다. 일희일비, 불행이 다가오면 분명 그 뒤에서 행복이 손을 내밀 것이다. 하지만 너무 깊게 파인 구덩이로 떨어진다면 행복도 손을 내밀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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