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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아 Sep 03. 2024

존재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01 여름과 석호


 “인자 직원 둘 된 거야?”

 서점 문이 활짝 열리며 반가운 표정의 봉석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그가 카운터에 나란히 앉아있는 미화와 여름을 향해 소리치자 매장 안 손님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그렇지 않아도 눈에 띄는 노란 형광색의 편의점 유니폼이 더더욱 빛나고 있었다.     


 곧 칠순을 앞두고 있는 봉석은 옆 동네 후월동에서 석호의 아버지가 서점을 운영하던 무렵부터 오랜 단골손님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늘 거동이 불편한 부인을 데리고 서점을 방문하곤 했는데,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던 그가 다시 나타났을 때 그의 곁에 더 이상 그녀는 없었다. 그즈음 석호 역시 하나뿐인 가족을 떠나보내고, 서점을 새로이 이전하기 위해 선택한 동네가 바로 이곳 선월동이었다. 그렇게 둘은 다시 만났다. 봉석은 석호 아버지의 부고를 안타까워했고, 그건 석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둘의 관계는 가게 주인과 오랜 손님 그 이상의 것이 되고 있었다.

 봉석이 서점 옆에 위치한 편의점에서 일을 하게 된 것도 석호의 도움이 컸다. 원래는 중학생 동하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학업에 집중해야 한다는 이유로 새 직원을 구하던 차였다. 석호는 자신 없어하는 봉석을 이끌고 편의점을 찾았다. 아내를 여의고 혼자가 돼버린 그에게 살아가야 할 의무를 주어야만 했으니까. 그곳에서 그는 손님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물건을 팔며 조금씩 삶의 활력을 찾아갔다.

 그렇게 일자리를 구한 지 어느덧 2년 차에 접어드는 봉석이었다. 엊그제만 해도 동하와 투닥거리며 인수인계를 받던 그가 이제는 물류 정리부터 계산까지 능수능란하게 할 줄 아는 직원이었다.   

  

 “미숫가루 한 잔 타드려?”

 그런 그의 우렁찬 목소리가 익숙한 듯 미화가 물었다. 그녀의 서글서글한 멘트에 봉석은 '한 잔 주면 좋지' 하며, 슬며시 여름의 앞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름을 곁눈질로 쳐다보는 봉석은 어쩐지 안부를 묻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조심스러운 듯 시답잖은 소리만 늘어놓았다. 아직 열기가 남아있는 커피포트를 다시 데우던 미화가 웃으며 봉석에게 말을 건넸다.

 “근데 이렇게 맨날 자리 비워도 되는 거예요?”

 봉석의 시선이 여름에게서 미화로 옮겨갔다.

 “뭘, 또 내가 언제 자리를 비웠다고?”

 미화가 투덜대는 봉석의 앞으로 따뜻한 미숫가루 한 잔을 놓았다. 수저로 뭉쳐진 가루들을 부시던 그가 턱짓으로 여름을 가리켰다.

 “여기도 한 잔 줘! 아주 그냥, 살아있는 좀비가 따로 없구먼. 아니믄 이거 먼저 먹든가!”

 봉석의 말에 흠칫 놀란 여름이 아직 마시던 녹차가 절반이나 남아있다며 들어 보였다. 그제야 봉석은 들릴 듯 말 듯한 혼잣말로 잘 먹어야 살아갈 힘도 생기는 거라며, 호로록 소리를 내고는 한 번에 미숫가루를 들이켰다.

 “제가 옆에서 잘 맥이고, 잘 보살피고 있으니까 걱정 붙들어 매셔요.”

 그를 안심시키는 미화의 말에 봉석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탁-

 이윽고 테이블 위로 컵이 놓이는 소리가 들리며, 봉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동안 별 일은 없었는지, 건강은 어떤지 대화도 하기 전에 잘 마셨다며 인사를 하는 봉석을 보며 미화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벌써 가시게요?”

 “아, 왜케 자리 자주 비우냐 매!”

 그의 투덜대는 목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 퍼졌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쓴 컵은 매장에서 분리수거하겠다며 주머니에 챙기는 봉석이었다. 그가 서점을 나서다 말고 할 말이 생각난 듯 이내 걸음을 멈춰 뒤를 돌아보았다.

 “… 그래서 앞으론, 계속 나오는겨?”

 봉석의 물음에 여름이 네, 하고 대답하자 그의 얼굴에 보일 듯 말 듯한 옅은 미소가 번졌다. 

 “이따가 삼각김밥 사러 갈게요!”

 한 손을 흔들어 보이며 매장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에 대고 미화가 소리쳤다.      

 특별한 말을 건네지 않아도 존재만으로 위로가 되는 관계가 있다. 여름에겐 이곳 선월동의 주민들이 그런 의미였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사람의 온기이자 익숙한 목소리들…. 그랬기에 더욱 그의 얼굴이 보고 싶은 여름이었다. 얼른 석호가 다시 나타나 예전처럼 웃으며 일상을 보낼 수 있길 더욱더 간절해졌다.     


 “사장님, 이 책 잘 나가나요?”

 미화가 건넨 따뜻한 차를 마시며, 한참 동안 매대를 살피던 손님이 카운터로 책 한 권을 가져왔다.

 “그럼요. 내용이 너무 좋아서, 저는 밑줄 그어가며 봤는걸요.”

 미화는 자신이 정독한 책이라며 말을 이었다. 조만간 베스트셀러가 될 것 같다며 싱긋이 웃어 보이는 미화였다.     


 그도 그럴 것이 주인 없는 빈 서점에서 홀로 남겨진 그녀를 달래준 건, 다름 아닌 책이었다. 미화가 서점을 지켜낸 1년 동안 그녀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내가 여기서 평생 읽을 책 다 읽었잖아.”

 책을 읽는 동안 그녀는 무수히 많은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 시간으로 인해 마음을 단단히 먹게 됐다며, 뇌를 비우는 데는 독서만큼 좋은 것이 없다는 미화였다. 그녀의 말에 손님은 깨끗이 비워낸 찻잔처럼 마음을 다스리겠다며 책을 구매했다. 손님을 마중한 뒤, 매장을 정리하는 미화의 뒷모습을 보며 여름을 알 수 있었다. 우스갯소리로 말을 하는 그녀였지만, 사실은 울고 있었다는 걸. 혼자서 견뎌낸 외로운 시간들이 안쓰러워 여름이 미화를 꼭 껴안아주었다.     


 이윽고 매장 밖으로 차가 들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여름과 미화의 시선이 트럭으로 향했다. 운전석에서 내리는 낯선 남자를 보며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어렸던 미화의 눈이 다시금 아쉬움으로 바뀌었다.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었던, 보고 싶었던 얼굴이 있었으리라. 미화가 쓸쓸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이윽고 앞치마를 벗었다.

 “… 나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볼까 해.”

 눈시울이 붉어진 미화가 짐을 정리하고 오겠다며 발걸음을 돌렸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창고로 향하는 그녀의 뒷모습은 떨리고 있었지만, 여름은 그녀의 결정을 존중해 주기로 했다. 미화가 자리를 비운 동안 여름이 카트를 끌고 오는 직원을 보고는 서점 문을 열어주었다. 감사하다고 인사를 건넨 뒤, 카운터에 차곡차곡 책을 내리는 남자를 향해 여름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혹시 김영일 부장님은….”

 “김 부장님 출산휴가 가셨잖아요! 이제 한 달 남으셨을걸요?”

 우연히도 미화가 서점에 와있는 시간 동안 출산휴가를 낸 영일이었다. 예쁜 딸을 순산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던 미화는 서점을 지키는 동안 잠시라도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음에 감사했다. 끝내 야위어버린 서로의 얼굴을 보며 마지막 인사조차 할 수 없었지만. 

 “어우, 이거 왜 이렇게 무겁니!”

 한가득 짐을 챙겨 든 채 창고 문을 열고 나오는 미화의 눈이 빨개져 있었다. 아마도 창고에서 혼자 숨죽여 울다 나온 듯했지만, 더 이상은 울고 싶지 않은 듯 애써 목소리에 힘을 실어 말하는 미화였다.  

   

*     


 “사장님- 나 약속 지키러 왔어!”

 카운터 위로 삼각김밥 두 개가 놓였다. 다시 고향으로 내려간다는 미화의 말에 삼각김밥을 꼭 쥐어주는 봉석의 얼굴에 서운함이 내비쳤다.

 “한 명이 오니까, 한 명이 가네!”

 입술을 삐죽이는 봉석을 향해 미화가 삼각김밥을 들어 보이며 싱긋이 웃어 보였다.      


 여름과 봉석이 택시에 짐을 싣는 미화를 마중했다. 못다 한 말이 많았지만 굳게 마음을 먹은 그녀를 붙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먹먹한 표정의 여름을 보며 미화가 차창너머로 얼굴을 내밀었다.

 “우리 평생 안 볼 거 아니잖아. 전화 자주 하고!”

 미화가 봉석과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다음에 만날 때도 지금처럼 반드시 건강하기로.

 “기사님, 오라이-”

 미화의 밝은 표정과 힘찬 목소리만 남긴 채, 택시는 멀어져 갔다. 미화는 짐도, 마음도 홀가분해진 상태로 선월동을 떠났다.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면서.     


 서점 문을 열고 들어온 여름이 매장을 둘러보았다. 미화가 떠나고 나니 이제는 정말 혼자가 되어버린 공간이었다. 일 년 반 사이에 크게 바뀐 건 없었지만 익숙하지 않은 공기였다. 과연 그 없는 이곳에서 혼자 잘 적응해 나갈 수 있을까. 사실 여름은 자신이 없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를 그를 한없이 기다리는 일은 큰 용기가 필요했으니까. 자신도 모르는 새에 짧은 한숨을 내쉬는 여름이었다.     


 “저기….”

 쌓여있는 책을 정리하려 카운터로 향하는 여름의 뒤로 조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여름이 뒤돌아보자, 미화를 마중한 사이 비어있던 서점을 찾은 효원이 보였다. 그녀는 여름의 사고가 있기 전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서점을 방문해 책을 사가던 단골학생이었다.

 “오랜만이에요.”

 여름이 반가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여름을 향해 효원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수험생인 효원은 늘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이 있는 손님이었다. 문제집보다 청소년 서가에 오랫동안 머무르다 가는 똑똑하고 야무진 학생. 그런 효원이 카운터로 올 때는 책의 위치를 묻거나, 결제를 하기 위해서였다. 당연히 여름은 오늘도 그녀가 서가 위치를 물어볼 것이라 생각해 대답했다. 복귀한 뒤 처음 맞는 손님이었기에 더욱 긴장된 표정으로 효원을 쳐다보는 여름이었다.

 “… 저, 책 한 권만 추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어쩐지 여름이 알던 평상시의 효원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불면증에 관한 책을 찾고 있던 효원의 낯빛은 유난히 어두웠다. 걱정이 많아 통 잠을 자기 힘들었던 탓에 약을 사다 먹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잠이 들기까지 깨어있는 시간은 그녀에게 고통의 연속이었다. 여름은 그런 효원이 안쓰러웠다. 아직 세상을 제대로 경험해보지도 못한 어린아이가 어떤 근심과 걱정으로 잠을 못 자며 지내는 걸까. 

 포스기에 '불면증'이라는 단어를 적어보는 여름이었다. 재고가 많지는 않았지만, 서점에는 비슷한 종류의 다양한 책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여름이 [건강] 서가로 향해 효원이 읽을만한 책들을 골라 꺼내보였다. 한 권의 책이 꼭 그녀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자신도 잠 못 들던 날이 있었다. 침대에 누우면 혼수상태에 빠져있는 자신을 보고도 곁을 떠나 석호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 도통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니, 그녀는 여전히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잠을 청하기 힘들었을 때 나는 어떻게 했더라…. 

 “나는 그냥 눈을 꼭 감고 있었던 것 같아.”

 여름이 말했다. 

 “잠은 안 오고, 별 생각만 계속 들면, 신경을 머리에 집중하지 말고 내 눈에 집중해 봐요. 그러면 눈을 감고 있는데도 눈앞이 더 캄캄해지면서 신기하게 잠이 들더라고.”

 이 순간만큼은 서점 직원이 아닌 동네 언니로서 효원을 보듬어주고 싶은 여름이었다. 어떤 생각들이 너를 지독하게 괴롭히는지는 몰라도, 결국에는 다 지나갈 거라고. 어리둥절한 표정의 효원을 보며 여름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떠보였다.

 “… 감사합니다.”

 효원이 매대 위에 놓인 책들 중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이 책 읽고 잘 잤는지 다음에 꼭 얘기해 줘요. 괜찮으면 나도 사게.”

 서점을 나서는 효원의 뒤로 여름이 웃어 보였다. 오늘 그녀가 사간 한 권이 책이 효원을 꿈속의 편안한 세상으로 데려가 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여름은 익숙하게 입고를 잡기 시작했다.     


 다시 여름의 일상이 돌아왔다. 총판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으며 책을 가져다주었고, 낯익은 손님들 역시 여름에게 살이 많이 빠졌다며 안부를 전했다. 괜찮아진 건 아니었다. 그녀의 매 시간은 석호의 기억으로 괴로웠으니까. 출근할 때도, 퇴근할 때도, 그리고 집에 혼자 있는 시간도 마찬가지였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몇 년의 세월이 흘러서도 그가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그녀는 지금처럼 살아가고 있으리라 다짐했다. 이토록 시간이 느리게 갔던 적이 있을까, 여름의 시계는 석호가 사라진 그날부터 멈춰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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