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여름과 석호
오늘도 손에 집히는 대로 편한 바지에 후드티를 주워 입었다. 그저 추위만 막으면 될 일이었다. 외투를 걸치고, 백팩을 멘 채 집을 나서는 여름이었다.
금방이라도 봄이 올 것 같더니 날씨가 다시 변덕을 부리기 시작했다. 밤새 내린 함박눈에 길목마다 수북하게 쌓인 눈을 밟으며 걸어간 지 10분쯤 됐을까. 저 멀리 [계절서점]이라 쓰인 간판이 보였다. 겉에서 볼 때와 달리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생각보다 큰 규모에 손님들은 늘 감탄사를 내뱉었다. 오늘처럼 봄이 오길 시기하는 겨울이 눈을 흩뿌리는 날이면 유난히 따뜻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되는 동네 서점, 그러나 주인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가게였다. 조금씩 석호 없는 이 공간에 적응해 나가는 여름이었다.
여름은 히터를 켜고, 따뜻한 난로에 몸을 녹이는 이 시간을 제일 좋아했다. 불 꺼진 공간에 서서히 따뜻한 열기가 차오르길 기다릴 때면 마음이 평온해졌다. 열에 아홉은 온라인 서점을 이용한다지만, 2년 전 이곳 선월동이 생길 무렵 함께 들어선 계절서점은 여전히 많은 손님이 찾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옆 동네 후월동에서부터 석호의 아버지가 35년 동안 지켜온 역사 깊은 가게였으니까.
오픈을 하는 순간부터 여름의 머릿속은 석호로 가득했다. 작년 9월, 9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혼수상태였던 여름이 병원에서 눈을 떴을 때 석호는 이미 그녀의 곁을 떠나버린 뒤였다. 건강을 회복해야 할 시기에 경찰서와 동네 사람들을 수소문하며 정신없이 다니는 여름을 보며 주위 사람 모두가 그녀를 말렸다.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 그의 부재를 받아들여야 했던 세 달 동안 여름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가족도, 친구도 보이지 않던 시간이었다. 모든 걸 포기하고 내려둔 채 그저 방 안에서 꼼짝없이 누워만 지냈다. 평생 봄이 없는 인생을 살아왔던 삶에 처음으로 봄의 설렘을 기다리게 한 사람이 곁을 떠난 순간부터 자신도 살아갈 이유가 없어졌다.
조금씩 현실을 깨닫게 된 건 그런 그녀를 매일같이 찾아와 준 미화 덕분이었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그저 멍하니 울기만 하는 여름의 입에 물이라도 욱여넣는 미화를 보며 혼자 참아왔던 고통을 쏟아내는 여름이었다.
“상황이 달라지는 일은 없을 거야. 그러니까 여름아, 그냥 믿자. 석호 씨… 어디선가 잘 살고 있을 거야.”
그때부터 여름은 점차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언제라도 석호가 돌아오는 날, 이곳 이 자리에서 그를 맞이하겠다고. 그가 없는 이곳을 지켜내기 위해, 여름은 혼자 서점 문을 열기 시작했다.
얼었던 몸이 조금씩 풀리자 여름이 주광색 조명을 켜 실내를 환하게 밝혔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밤새 쌓인 먼지를 털어내는 여름이었다. 이윽고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소식 없이 조용히 지나간 밤이었던 듯했다.
“당장 다음 달에만 앞 단지에 1500세대 넘게 입주한대. 벌써 개교한 학교만 세 군데고. 그게 무슨 말인지 알지?”
그녀의 말에 따르면 요즘 젊은 세대는 디지털과 비대면을 좋아한다고 했다. 실시간 온라인 채팅은 미화가 이곳에 있는 동안 만들어 낸 새로운 소통 창구였다. 신기하게도, 점차 온라인 문의가 늘어나면서 최근에는 전화 대신 컴퓨터로 답하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비록 지금은 이곳을 떠나 고향에 내려가있지만, 미화는 역시 장사에 탁월한 수완이 있는 사람이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여름이 어젯밤 대충 맞춰두고 간 시제를 확인했다. 손이 작아서였을까, 유난히 돈을 세는 속도가 느린 여름이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석호는 늘 그림의 어깨를 툭툭 치라는 잔소리를 했다. 마치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은 기분에 여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사람의 기억이란 참 신기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잊으려 하면 할수록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더욱 생생해졌으니까.
여러 번 세어봐도 시제가 맞지 않았다. 아무리 마감 때 정확하게 세어놓는다고 해도 간밤에 귀신이 들렀다 가는 건지 아침만 되면 현금이 많거나 적기 일쑤였다. 여름이 혼자 일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런 일이 비일비재해진 걸 보면 아마도 본인 탓이리라. 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 마감 봉투에 넣는 여름이었다. 자꾸만 떠오르는 석호의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서랍 문을 쾅- 하고 세게 닫아버렸다.
순간적으로 머리맡에서 따스하고 고요한 느낌이 났다. 어쩐지 코 끝으로 그의 알싸한 향수냄새가 나는 듯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서점에 내리쬐는 햇빛이 환했던 건 그녀의 착각이 아니었다. 오늘의 첫 손님이 서점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입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얼어버린 여름의 심장이 심하게 떨렸다. 금방이라도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손님은 더 가까이 들어오지 않은 채 매장 문 앞에 서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뒤로 내리쬐는 햇살 덕에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여름은 분명 알 수 있었다. 그토록 애타게 그리워했던 남자라는 걸. 서로 눈이 마주치자 여름의 손에 힘이 풀려버렸다.
*
그런 날이 있다. 자신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이 다 꿈처럼 느껴지는 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마치 매일이 평온했던 것처럼, 행복했던 것처럼. 오늘이 여름에겐 그런 날이었다.
오랜만에 느껴본 그 감정이 좋아서였을까, 여름이 이제는 낯설어져 버린 무감각한 아침을 마주한 채 멈춰버렸다. 이미 두 시간 전에 눈을 뜨고 있었지만 여름은 일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잠에서 깨고 나면 꿈에서 본 그의 어렴풋한 모습까지 금방이라도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너무도 보고 싶던 얼굴이었다.
야속하게도 창문 너머 환히 내리쬐는 햇살에게 자비란 없었다. 애써 눈을 뜨지 않으려 뒤돌아 버티는 여름의 등 뒤가 빠르게 뜨거워졌다. 마치 내가 이기나 네가 이기나 해보자는 듯, 햇살은 더욱 세게 여름을 비추었지만 끝내 꼼짝하지 않는 여름이었다.
석호는 그녀가 옆으로 돌아누울 때마다 늘 뒤에서 그녀를 안아주었다. 자신이 그늘이 되어주겠다며, 뜨거워진 여름의 등을 매만져주던 석호였다. 그런데 그 자리가 지금은 텅 비어버렸다. 여름이 꼭 감고 있던 두 눈 사이로 맑고 굵은 눈물을 한 방울 떨어뜨렸다. 잘 참고 버텨내던 서러운 감정이 터져버렸다. 그런 여름의 슬픔에 주춤한 겨울 햇살이 재빨리 자취를 감추자, 울고 있는 여름의 위로 그늘이 드리웠다. 미안하다고, 지금부터는 마음 놓고 울어도 된다는 듯이.
그제야 힘겹게 눈을 뜨는 여름이었다. 9시 20분, 핸드폰 알람이 크게 울렸다. 마냥 누워있을 시간이 없었다. 여름이 무거운 몸을 애써 일으키며 화장실로 향했다. 풀어헤쳐두었던 머리를 질끈 묶은 채 세수를 하는 둥 마는 둥 대충 마치고 나오는 그녀의 얼굴에 홍조빛이 붉게 바래있었다.
“화장 안 해도 예뻐. 하면 더 예쁘고.”
화장기 없는 얼굴을 보자 석호가 늘 자신에게 해주던 말이 떠오르는 여름이었다. 언제쯤이면 그가 생각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기초과정은 전부 생략한 여름이 크림 하나만 대충 바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그가 함께 한 그녀의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