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운아 Sep 05. 2024

마음서가

01 여름과 석호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매일 오가는 이 거리도, 가는 길에 마주치는 가게들도. 새로 들어서는 상점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과 석호가 곁에 없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모든 게 그대로였다. 13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여름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꿈속에서 본 석호의 모습이었다. 혹시나 오늘 그가 나타나는 건 아닐까, 헛된 기대를 하며 걷는 그녀의 발길이 어느덧 서점 앞에 다다랐다. 그리고 습관처럼 오픈을 하기 전 여름은 문 앞에 「마음서가」라는 팻말이 붙어있는 작은 우체통을 열었다.     


 “그래서 또 뭐가 하고 싶은 거야?”

 석호의 시선이 여름의 손가락 끝으로 향했다.

 “저기에 우체통을 하나 만드는 거예요!”

 입술을 달싹이며 말하는 여름의 눈빛이 반짝였다.

 “우체통?”

 석호가 감이 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여름을 쳐다봤다.

 “왜, 무인편의점 같은 거 있잖아요. 우리도 그런 서점을 만드는 거죠- 혹시 책을 선물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직접 주기 망설여질 때 우리 우체통을 마음껏 이용하도록!”

 “직접 찾아갈 수 있게 하자는 거지?”

 여름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여름은 그가 고뇌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고민이 있을 때면 은연중에 시선이 아래로 향하며, 한쪽 보조개가 진해지는 석호였다. 그의 표정을 보는 여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사람들이 책을 선물하는 이유가 뭐겠어요?”

 석호가 시선을 들어 여름을 쳐다봤다.

 “선물을 받을 사람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겠죠. 고마워라던가, 축하해, 아니면 사랑해 같은.”

 사실 석호는 여름의 말에 크게 동의하지 않는 듯했다. 그는 단순히 좋은 책을 발견했을 때나 재밌게 읽은 작품을 친한 지인들과 함께 읽고 싶은 마음이 들면 책을 선물하고는 했으니까.     


 여름이 등을 돌려 서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기 힘든 말은 생각보다 많아요. 부끄럽고, 어렵고, 마음의 준비도 필요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책으로 대신 전하기도 해요.”

 석호는 어쩐지 그녀의 등 뒤로 낯선 쓸쓸함이 느껴지는 듯했다.

 “아니면 얼굴을 직접 보고 하기 어려운 말일지도 모르고요.”     


 여름은 알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 자신의 아이디어는 수요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은 분명했다. 이 큐레이션은 반드시 누군가에겐 큰 도움이 될 거라는 것이었다. 석호가 그녀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도 어쩌면 그래서였을까.

 “그러면 우체통 이름은 뭐가 좋을까?”

 “음…. 마음서가 어때요?”

 “마음서가라. 좋네.”

 여름이 환하게 웃으며, 석호에게 안겼다. 그런 그녀가 귀여운 듯 크게 웃음을 터뜨리는 석호였다. 이튿날 매장 앞으로 빨간 우체통이 들어섰다. 「마음서가」라는 팻말을 붙인 채.


 그가 없는 사이 마음서가에는 많은 손님이 다녀갔다. 오랫동안 학교 선배를 짝사랑했다는 여대생의 고백, 우울증에 걸린 친구를 위로하는 친구의 진심, 그리고 정년 퇴임을 앞둔 직장 상사에게 전하는 감사인사와 전해지지 못한 또 하나의 마음이 있었다. 무슨 사연이 있어서 반년이 넘는 시간 동안 선물을 받고도 찾으러 오지 않는 걸까, 여름은 생각했다.

 전해주지 못한 선물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기에 석호와 논의를 나눈 적이 없었다. 그가 돌아온다면 가장 먼저 서점 운영에 대한 얘기부터 나눠야 했다. 아니, 사실은 일을 핑계 삼아서라도 얼른 석호가 나타나기만을 바라는 여름이었다.

 목을 휘감고 있던 머플러를 푸르자 목 뒤로 맺혀있던 땀방울이 시원하게 날아갔다. 가방만 내려둔 채 창문부터 활짝 여는 여름의 시선이 문득 한쪽 벽면에 걸려있는 달력으로 향했다. 3월 20일에 빨간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곧 있으면 서점의 창립기념일이라는 걸 석호는 알고 있을까. 여름은 믿고 싶었다. 올해는 반드시 그와 함께 할 수 있을 거라고.     


 “안녕하십니까-”

 땀방울이 채 식기도 전에 서점 문이 열렸다. 잠시 기대감이 스쳤던 여름의 얼굴에 금세 쓴웃음이 번졌다. 오늘도 가장 먼저 서점 문을 두드린 건 예명문고였다. 사장님이 너무 부지런해 가끔은 오픈을 하기도 전부터 문 앞으로 배송이 되어있는 만화책 총판이었다.

 “에이, 들지 말고 놔둬.”

 여름의 손이 닿기도 전에 수십 권의 책이 밴딩 된 박스가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투박한 말투의 총판 사장은 늘 책을 들어주려는 여름을 말리는 젠틀한 중년의 신사였다. 그는 석호가 사라진 뒤부터 계속해 말라가는 여름을 걱정했다. 여름이 명세서에 사인을 해 건네자 밥 좀 잘 챙겨 먹으라며, 걱정하듯 인사를 건넨 뒤 매장을 나서는 그였다.     


 어젯밤에 주문한 양보다도 책이 많이 들어온 걸 보니 아무래도 신간이 입고된 듯했다. 튼튼하게 책을 고정해 둔 끈을 잘라내니 한 종류의 책들이 여러 권 모습을 드러냈다. 대충 봐도 서른 권은 족히 돼 보이는, 20년 넘게 완결이 나지 않은 만화책이었다. 여름이 컴퓨터에 정리해 둔 고객 주문장을 열어 문자를 남겼다. 

    

 [고객님께서 주문하신 도서가 입고되었습니다. 카운터로 방문해 주세요. -계절서점]     


 어제 오후, 하교하자마자 설레는 걸음으로 서점을 찾아 만화책을 주문해 두고 간 학생이었다. 문자를 받고 서점으로 달려올 모습을 생각하니 여름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그렇게 여름은 조금씩 사람들에게 치유받으며 일상을 회복해나가고 있었다. 총판 직원들에게, 그리고 손님들에게.

이전 03화 주인 없는 가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