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효원과 혜미
서점의 오전은 한가했다. 학기 중엔 학생들이 아침부터 서점에 올리 만무했기에 여름은 천천히 입고작업을 시작했다. 한 권씩 책을 꺼내 바코드를 찍고, 금액과 매입률을 확인했다. 입고된 도서의 실물과 전표상의 내용이 일치하면 카테고리별로 책을 분류해 서가에 꽂으면 되는 일이었다. 어느덧 2년 차 서점 직원인 여름은 석호가 없더라도 해야 할 일들을 혼자서 해내고 있었다. 여름이 높게 쌓인 만화책을 잔뜩 들어 올리다 말고 카트 위에 옮겨 담았다.
“손으로 들지 말고, 카트 끌고 가!”
“이 정도는 괜찮아요-”
서점 일을 처음 시작했을 무렵, 여름은 늘 스무 권 정도 되는 책들을 두 팔로 거뜬하게 들어 옮겼다. 그런 그녀를 보며 석호는 매사에 그녀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으면서도, 숨 가쁘게 걸어가는 여름의 앞에 카트를 끌어다 주었다.
“지금이야 괜찮지, 시간 지나면 몸으로 온다니까.”
비록 그의 말투는 무뚝뚝했지만, 석호는 여름이 힘겹게 들고 있는 책들을 받아 카트 위로 올려주었다. 여름은 어쩌면 그가 좋은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날따라 여름의 눈엔 만화책을 정리하는 그의 손가락이 참 예뻐 보였다.
석호 없는 이곳을 여름이 혼자 지켜낸 지도 4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곳곳마다 남아있는 그의 흔적들은 여전히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매 순간 떠오르는 그와의 기억에 여름의 눈시울이 또다시 붉어졌다.
카트를 미는 그녀의 뒤로 휴대전화가 울렸다. 저장돼있지 않은 번호임을 확인한 여름이 한숨을 짧게 내쉬고는 애타게 울리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몇 번의 진동이 더 울렸지만, 여름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책을 정리할 뿐이었다.
“시험 10분 남았습니다. 슬슬 마킹하세요.”
여기저기서 문제를 푸는 아이들의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효원은 배를 움켜쥔 채 얼굴 위로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냈다. 입술을 꽉 깨물며 참아보았지만 도저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마킹하는 효원의 손이 떨려왔다. 고3 수험생활의 첫 중간고사였기에 어떻게든 시험을 잘 봐야만 했다.
“펜 내려놓고, 맨 뒷줄부터 시험지 앞으로-”
이윽고 선생님의 말씀과 함께 시험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교실은 삼삼오오 모여 앉은 아이들이 서로가 푼 정답을 맞히는 소리로 웅성였다.
결국 효원은 마킹을 끝내지 못했다. 망연자실한 채 앉아있는 효원의 앞으로 동하가 시험지를 펄럭이며 다가왔지만, 효원은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정효원!”
자신을 부르는 동하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효원이 교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염려하던 일들은 현실이 됐다. 시험기간 동안 효원은 자꾸만 머릿속을 헤집는 온갖 생각들로 인해 도저히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오늘 아침까지도 슬슬 배가 아파오더니, 결국 시험을 망쳐버렸다.
[왜 그래? 잘 못 봤어? 전화 줘.]
효원은 동하의 문자에도 답장하지 않았다. 길을 걷는 효원의 피부 위로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조금씩 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눈발은 무섭게 굵어져 갔다. 온종일 따뜻할 거라던 기상청은 발 빠르게 날씨 소식을 바꾸고 있었다. 시험은 망치고, 우산은 없고, 벚꽃이 펴야 할 계절에 눈이 내리는 날이라니. 오늘의 날씨가 꼭 제 인생 같다고 생각하며 효원이 눈인지 눈물인지 모를 눈물을 훔쳤다.
*
입고작업을 하다 보면 어느새 오전 시간은 훌쩍 흘러갔다. 책 정리를 마치고 핸드폰을 확인했을 땐, 같은 번호의 부재중 전화가 6통이나 찍혀있었다. 이를 본 여름이 앞치마를 벗으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게를 나서려는 여름의 시야에 온통 하얗게 물들어있는 문 밖의 풍경이 들어왔다. 믿기 힘든 날씨에 여름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지만, 분명 함박눈이었다. 우산을 챙기려다 말고 대충 손으로 얼굴만 가린 채, 가까운 봉석네 편의점으로 뛰어가는 여름이었다.
카운터에 서있는 봉석의 앞으로 샌드위치와 삼각김밥이 놓였다. 봉석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여름을 쳐다보았다.
”이걸로 되겠어? 좋은 걸 먹어야 건강하지!”
그의 말에 여름은, 먹고 싶은 게 가장 건강한 거라며 능글맞게 웃어 보였다. 음식을 데우는 동안 여름은 창밖으로 내리는 눈을 구경했다.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 4월의 함박눈은 다소 생소했지만, 어쩌면 이곳을 떠나기 아쉬워하는 겨울이 마지막으로 내리는 눈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 우산도 쓰지 않은 채 걸어가는 여학생이 보였다. 효원이었다.
‘어? 아직 수업 시간 아닌가….’
여름의 시선이 효원이 남기고 간 발자국을 따라갔다. 이윽고 편의점으로 들어오려다 말고 여름과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라며 발길을 돌리는 효원이었다. 어리둥절한 여름의 뒤로 전자레인지에서 조리가 끝났다는 알람이 울렸고, 여름이 얼른 뜨겁게 데워진 음식을 꺼냈다.
“이것도 하나 결제해 주세요!”
봉석에게 꾸벅 인사한 뒤 부랴부랴 편의점을 나서는 여름의 손에 작은 우산 하나가 들려있었다. 지난번 사간 책은 어땠는지도 물어보고 싶은 여름이었지만, 그새 효원의 모습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오늘도 그녀의 안색이 좋지 않아 보였기에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무겁게 발걸음을 돌리는 여름이었다.
버스정류장에 다다른 효원이 몸에 묻은 눈을 털어냈다. 생각이 짧았었다. 동네 편의점을 가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서점 직원 언니까지 있는 곳이라니. 그녀를 미처 발견하지 못해 문을 열고 들어갔더라면, 그리고 그들이 있는 데서 임신테스트기를 구매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멀리서 여름을 발견하고 조금이나마 빨리 도망쳐 나온 게 다행이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눈은 그쳐있었다. 도착한 버스에 오른 효원이 창가석 앞으로 가 앉았다. 최근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던 건 아마도 불안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난달에 생리를 하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 만일 임신이 맞다면 앞으로 난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 장학생으로 멋지게 대학교에 입학해 졸업하고, 능력 있는 여자로 살고 싶은 효원이었다. 엄마처럼…. 완벽한 자신의 계획이 틀어질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앞으로의 내 인생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두려웠다.
[딸, 시험 잘 봤니? 학원 잘 다녀와. 오늘은 저녁 해 놀게.]
혜미로부터 문자가 왔다. 엄마한텐 뭐라고 말해야 하지? 내가 엄마처럼 살 수는 있을까? 걱정이 앞서는 효원이었다. 사실은 자신이 없었다. 내 인생을 희생하면서까지 아이를 키울 자신이. 일단 옷부터 갈아입어야 했다. 교복을 입은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한 채 산부인과에 갈 수는 없었으니까. 효원이 가까운 정류장에 내려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