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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아 Sep 07. 2024

차갑고 낯선

02 효원과 혜미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서둘러 방으로 들어간 효원이 온통 트레이닝복뿐인 옷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뭘 입어야 그나마 학생인 티가 덜 날 수 있을까. 시간이 많지 않았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병원에 가려면 최소한 한 시간 반 정도의 여유 시간을 잡아야 했기에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배차 간격이 긴 탓에 이번 버스를 놓치면 다음 버스는 한 시간 넘게 기다려야만 했다. 대충 손에 집히는 후드티를 걸쳐 입고, 효원이 재빨리 집을 나섰다.

 저 멀리 타야 할 버스가 효원을 향해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산부인과 바로 앞에 서는 유일한 노선이었다. 버스보다 먼저 횡단보도를 건너야만 탈 수 있었다. 버스는 예상 시간보다 일찍 왔고, 오늘따라 신호등은 도통 켜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발만 동동 구르는 효원의 앞으로 버스가 쌩 하니 지나갔다. 미련 없이 가버리는 버스의 뒷모습을 보이며, 신호등은 그제야 건너도 좋다는 듯이 초록불을 켜주었다. 간발의 차로 버스를 놓치다니. 되는 일이 없는 날이었지만 더 이상의 스트레스는 산모에게 좋지 않았다. 혹시 모를 변수에 대비해 다른 버스를 알아두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효원이었다. 비록 두 번 갈아타야 했지만, 진료만 받을 수 있다면야 괜찮았다. 효원의 귓가에 깐깐하게 들리던 간호사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진료 마감은 5시입니다. 늦게 오시면 진료 못 받으세요.”     


 걷다 보니 3층 높이에 눈에 띄게 걸려있는 산부인과 간판이 보였다. 이곳 건물 1층에 편의점이 있을 것이다. 사실 확인부터 해야 했다. 만일 임신이 아니더라도, 발랑 까진 고등학생으로 보이긴 싫었으니까.

 효원이 편의점에 들러 매장 한 바퀴를 둘러보았다. 임테기의 위치는 이미 인터넷으로 찾아볼 만큼 찾아본 터라 어디 있는지 진작 알고 있었지만, 쉽사리 집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누구라도 자신이 미성년자라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바쁘게 일하고 있을 엄마에게 전화를 할 것만 같았다. 효원이 최대한 자연스럽게 카운터에 임테기를 올려놓았다. 

 “3500원입니다.”

 편의점 직원의 말에 효원은 습관처럼 카드를 내밀었다. 아차, 엄마 카드였다. 결제가 이루어지는 즉시 엄마한테 문자가 갈 것이고, 그러면 혜미는 효원이 지금 학원이 아닌 시내 편의점에 와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터였다.

 “아, 잠시만요!”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에 당황한 효원이 얼른 카드를 뺏어 들었다. 긴장한 탓인지 허둥지둥 대는 효원과 임테기를 번갈아보는 직원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효원의 이마에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침착해야 했다. 남들이 볼 때는 마치 그녀가 물건을 훔치다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수상해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갑에서 현금 4천 원을 꺼내 건네자 직원이 동전 다섯 개를 거슬러주었다. 얼른 임테기를 숨기듯 챙긴 뒤, 거스름돈을 받아 나서려던 효원이 그만 동전을 놓치고 말았다. 떨어진 동전들이 편의점 구석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매장 안의 모든 시선이 효원에게 향했다.

 “어, 저기요!”

 메아리 울리듯 퍼지는 편의점 직원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효원은 냅다 그곳을 빠져나왔다.     


 도망치듯 건물 안으로 들어온 효원이 숨을 가다듬고 엘리베이터를 호출했다. 마치 이 안에서 산부인과를 방문하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는 것 같았다. 만원인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아니나 다를까 3층에서 내리는 건 자신 뿐이었다. 어쩐지 닫히는 엘리베이터 사이로 사람들의 따가운 눈초리가 느껴지는 듯했다.

 복도 끝으로 걸어간 화장실엔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효원이 적당한 세 번째 정도 칸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500원이나 비싸게 산 임테기를 꺼내 들었다. 기상 후 아침 첫 소변이 가장 정확하다지만, 집에서 임테기를 꺼낸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굳게 마음을 먹고 있던 터였다. 그랬기에 눈앞에 선명히 찍힌 두 줄을 보며 효원은 덤덤할 수 있었다.     

*


 “처음 오셨어요?”

 효원이 모자를 더욱 푹 눌러썼다. 네, 하고 대답하는 효원을 향해 간호사는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종이를 내밀었다. 진료 신청서였다. 효원이 빠르게 빈칸을 채워나가는 사이 그녀의 옆으로 몇 명의 엄마들이 지나갔다. 출산을 앞둔 임산부와 정기 검진을 받으러 온 예비부부, 그리고 남편과 함께 방문한 초기 임산부까지. 그들에게 이곳은 익숙하고 따뜻한 공간이었으리라. 정신없이 분주한 가운데 효원은 이 공간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시간만 멈춰있음을 깨달았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진료지를 작성해 데스크에 내미는 효원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학생임을 밝혀야 할까, 임신한 것 같으니 검사 좀 해달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대학생이라고 거짓말할까? 한참 동안 대답이 없자 그제야 간호사는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 효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앳된 피부와 화장기 없는 얼굴, 그리고 미성년자인 나이. 그녀의 주변에 보호자로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간호사는 효원이 입을 열기도 전에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원하는 의사 선생님은 있으신가요?”

 효원이 작게 고개를 흔들어 보이자, 그녀는 귀찮다는 듯이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저쪽으로 가셔서 번호표부터 뽑으시고, 혈압이랑 체중 측정하시면 되세요. 기다리시면 불러드려요.”

 그녀의 손끝이 '맘센터'를 가리켰다. 간호사가 시키는 대로 한 뒤, 효원은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길 기다렸다. 엄마가 되기 위한 이 모든 과정은 그녀를 주눅 들게 했다. 아빠가 없어도 스스로 당당하고, 당찬 학생이라고 생각했던 건 자신의 큰 오만이었다.     


 “정효원 님-”

 진료실로 들어가자 하얀 가운을 입은 채 근엄하게 앉아있는 의사가 보였다. 그녀는 경직된 자세로 들어오는 효원을 향해 인자한 미소를 지어주었지만, 효원은 쉽사리 긴장감이 풀리지 않았다. 자신을 쳐다보는 그녀의 눈에는 할 말이 많아 보였다. 잠시 숨을 고른 의사가 이내 효원과 눈을 맞춘 뒤 입을 열기 시작했다.

 “여기는 처음 와보죠?”

 효원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음…. 아직 학생인 것 같은데, 어떻게 왔을까? 일반 검진이라면 저리로 가야 하는데.”

 자신을 달래는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에, 효원은 사실 데스크에 있는 불친절한 간호사 언니가 멋대로 자신을 이곳으로 보냈다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실이었으니까. 의사가 이내 차트를 보며 되물었다.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차근차근 대답해 줄 수 있을까?”

 “네….”

 “일단 원하는 검사가 있다면 해볼 거예요. 자세한 건 그때 가서 얘기할 거고.”

 그녀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여기 온 거, 부모님은 알고 있나요?”

 다시 한번 고개를 작게 흔들어 보이는 효원이었다. 그녀는 검사결과가 나오면 혜미에게 연락이 갈 거라며, 정밀 검사를 받아야 하는 이유가 있는지 물었다.      


*     


 마지막으로 동하와 잠을 잔 건 두 달 전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병원을 찾은 것도, 엄마가 알게 될 거란 걸 몰랐던 것도 아니었다. 배에 닿는 차갑고 낯선 느낌에 효원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5주 차네요. 다음에는 보호자분 동행해서 함께 오세요.'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효원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걱정은 단 하나, 혜미였다. 이 사실을 엄마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까. 자신이 힘들게 걸어온 그 길을 하나뿐인 딸이 똑같이 걸어간다는 사실을, 그것도 딱 그 나이에. 그리고 만일 임신 소식을 들은 동하가 내 손을 놓는다면? 태어날 아기의 성은 '원'이 아닌 '정'씨가 될 터였다. 3대가 다 엄마의 성을 따를 생각을 하니, 갑자기 우스운 기분이 드는 효원이었다.     


 [어디야? 왜 학원 안 와?]

 [무슨 일 있어? 전화 왜 안 받아?]

 [걱정되니까 전화 좀 받아.]     


 집으로 가는 길 내내 효원의 핸드폰에는 연락이 닿지 않아 걱정하는 동하의 문자와 전화가 쌓여갔지만, 효원은 답장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을 직접 보고, 만나서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저 그가 얼굴조차 모르는 나의 아빠와는 제발 다른 사람이길 속으로 간절히 빌며. 어느덧 핸드폰 시계는 저녁 8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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