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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아 Sep 02. 2024

겨울 끝에서

01 여름과 석호


 또 꿈을 꾸었다. 그가 자꾸만 꿈에 나와 같은 말을 반복한다.      


 “누군가한테 가장 확실하게 복수하는 방법이 뭔지 알아?”

 그가 내게 물은 적이 있다.

 “그 사람 없이도 잘 먹고, 잘 사는 거 아냐?”

 그런 나를 보며, 이내 '아니'라고 대답하는 그였다.

 “...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사람이 되고 나서 영영 사라지는 거야, 그 사람한테서.”     


 그때는 별생각 없이 지나쳤던 말들이 이제야 여름의 머릿속을 헤집어놓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떠난 걸까. 그런데 왜? 대체 내가 뭘 잘못했길래. 이 모든 게 그의 계획이었다면 그의 복수는 성공적일 것이었다.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가 사라진다는 건, 남은 사람의 인생을 쉽게 망가뜨리는 일이었으니까.

 눈물샘이 말라버린 탓에 더 이상 흘릴 눈물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퉁퉁 부어버린 여름의 눈망울에서 마지막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그가 없는 두 달을 어떻게 보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견디기 힘들 만큼 고통스러운 나날 속에서 지금처럼 꿈에서나마 그를 만나며, 그저 그가 돌아오길 기다릴 뿐이었다.

 창밖으로 드리우는 강한 햇살에 겨우 정신을 차리는 여름이었다. 여전히 창가에는 살얼음이 잔뜩 껴있었지만, 이제는 추위가 한층 꺾인 듯했다. 봄이 오면, 아니, 봄이 다 가기 전까지 그는 꼭 돌아올 것이다. 

 여름은 그가 영영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했다. 어떻게 그렇게 잔인할 수 있을까. 내 인생에 평생 봄이 없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으면서.

 그가 사라진 겨울 끝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킨 여름이 쏟아지는 찬물에 몸을 맡겼다. 그녀의 머리칼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가 유난히 세차게 느껴졌다. 여름의 눈물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드디어 여름이 세상밖으로 나왔다. 하얀 모자를 쓰고 있던 나뭇가지에 조금씩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이끌고 서점으로 향하는 여름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혹시라도 그가 온다면 반드시 이곳을 찾을 테니까.     


 멀리 카운터에 서있는 미화의 모습이 보였다. 손님 앞에서 애써 미소 짓던 그녀는 손님이 매장을 나서자마자 힘없이 주저앉아버렸다. 제정신이 아닌듯한 표정이었다. 기분과 달리 문이 열리는 소리는 경쾌했다. 이윽고 미화가 고개를 들자 카운터 앞에 선 여름과 눈이 마주쳤다. 한참이나 서로의 야윈 얼굴을 보던 여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고, 미화 역시 그녀를 향해 싱긋이 웃어 보였다. 미화가 누시울이 붉어진 채로 천천히 여름에게 다가와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 그런 미화의 품에서 여름은 또다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눈물을 터뜨렸다.

 “고생했어.”

 여름을 다독이는 미화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석호와 여름이 자리를 비운 1년 동안 이곳을 지켜준 건 미화였다. 이정표조차 비어있던 오래전부터 터를 잡았던 선월동을 떠나 떠밀리듯 내려간 고향에서 그녀는 여름의 사고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한걸음에 서점으로 달려왔다. 어쩌면 다시 오기 힘들었을 이곳에, 제 자신도 감당하지 못했던 아픔을 안은 채로. 

 여름이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할 때 미화는 매일같이 그녀의 곁을 지켰다. 밥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았으며, 잠도 자지 못했던 여름을 돌봐주었다. 늦어도 괜찮으니 언제라도 마음의 준비가 되면 그때 서점으로 오라고. 모든 게 멈춰버렸을지도 모를 시간을 대신해 준 미화가 한없이 고맙고 미안한 여름이었다.

 “… 이제는 제가 있을게요, 오빠 올 때까지.”

 끝내 여름이 고개를 떨구자, 그런 그녀를 미화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서점에 돌아왔다는 건 아마도 석호의 부재를 받아들였다는 것일 테니까. 

 “… 괜찮겠어?”

 미화의 물음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여름이었다. 더 이상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그저 마음으로 서로를 위로하는 침묵의 시간이 흘렀고, 이내 둘의 뒤로 한기가 새며 서점 문이 열렸다.

 “어서 오세요.”

 미화가 재빨리 감정을 추스르며 여름을 의자에 앉힌 뒤 손님을 맞이했다. 쓰러지듯 자리에 앉은 여름의 몸에 힘이 풀려버렸다. 시야에 들어오는 물건들은 그를 떠올리게 했다. 장갑, 글씨, 충전기…. 모든 것이 석호의 흔적이었다. 순간 주체할 수 없이 솟구치는 감정에 여름이 몸을 웅크려 보였다. 겨우 말라버린 눈물이 다시 터져버릴까, 꽉 깨문 입술에서 비릿한 피맛이 느껴졌다.     


 여름의 앞으로 따뜻한 녹차 한 잔이 놓였다. 미화가 여름의 등을 토닥인 뒤 이내 손님에게로 향했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니 조금이나마 여름의 마음이 진정되었다. 손님의 옆에서 호탕하게 웃으며 대화를 나누던 미화가 슬쩍슬쩍 혼자 앉아있는 여름을 곁눈질해 보이고는 이윽고 여름의 옆으로 와 앉았다. 

 “당분간은 매장도 일찍 닫는 게 좋겠어.”

 웃음기 가신 표정으로 말을 건네는 미화를 향해 여름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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