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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글 Jan 13. 2021

그렇게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내가 출판사를 그만둔 이유 #3

어떻게 출판사 편집자 일을 시작하게 됐는지는 이전 글들에 잠깐 써두었었다. 궁금하다면 아래 글들을 살펴보시길...


참고 1- "나의 첫 직장, 작은 출판사" 

참고 2- "출판사 편집자로 일을 시작했다"


내가 출판사를 퇴사하게 된 결정적인 사유는, 2017년도에 서적 도매상 송인서적이 부도가 나면서 회사가 어려워진 일 때문이었다. (아마 대부분의 출판사들이 거래했을) 송인서적은 어음 만기일을 막지 못해 부도가 났고, 거래 중인 출판사들에게 그 피해가 고스란히 돌아갔었다. 우리 출판사도 범위 안에 있었고. (놀랍게도 당시 출판 업계엔 어음이 활발히 쓰였었다. 인쇄, 제작, 유통 전 단계에서 돌아야 하는 돈이 어음이라는 형태로 돌아다니는 거다. 아마 지금도 몇몇 곳에서는 쓰고 있을지도..)  


안 그래도 작은 규모의 출판사였는데 사장님이 이 사건으로 지게 된 빚이 수억원대라고 했다. 안 그래도 숫자 감각이 없었던 시절이었는데, 그게 참 크게 느껴졌었다. "빚이 N억이야."라고 말씀하시던 목소리와 장면이 아직도 생생한 걸 보니.


사장님의 낯빛은 날이 갈수록 점점 어두워졌다. 화기애애했던 사무실 내 공기는 더없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장님은 우리를 회의실로 한 명씩 불러 면담을 했다. 편집부 내에 막내 사원과 팀장을 제외하고는 정리하는 수순을 밟아야 한다고, 내게도 함께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첫 직장을 다닌 지 1년을 조금 넘긴 스물여섯의 일이었다. 다행히 회의실에는 갑 티슈가 있었다. 첫 해고를 통지받은 나는 당연히.. 그 티슈를 썼다. 아마 지금의 나라면 울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일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난 퇴사 사유라면, 내 안에도 출판 편집자를 그만둘 수밖에 없던 이유가 있다.


나는 남들보다 무엇인가를 잘 발견하는 편이다. 누가 길에 떨어뜨린 카드, 음식에 들어간 이물질, 타인의 허물, 이를테면 상대방이 틀린 맞춤법 같은 것들. 무엇이 됐든, 그걸 지적하든 않든 간에 이것들을 발견하면 기쁘고 보람찼다. 남들보다는 그나마 잘하는 영역이었으니까.


그래서 편집자의 업무 중 원고를 교정하고 교열하는 일에서는 아주 만족했다. 이건 이렇게 쓰는 게 맞지, 하면서 고치는 일이 정말 즐거웠으니까. 그렇게 교정지상에서 내 생각에 맞게 원고의 어느 부분을 고쳤고, 몇 주가 지나 책은 만들어졌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로 나는 바로 '내가 고친 그 부분'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러니까, 저자가 쓴 원래의 표현 그대로 두는 게 맞았다. 그런데 나는 내가 믿고 있던 알량하고 얄팍한 것들에 기반해 멋대로 고쳐버렸다. 그리고 수정할 수 없도록 책으로까지 만들어버린 거다.


그걸 알게 된 순간, 나는 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그 잘났던 내가 틀렸고, 그 일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온몸이 찌르르했다. 어떤 글자들을 고치는 일은 내 생각만큼 가볍게 이루어지면 안 된다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알게 됐다. 어쩌면 더는 그곳에서 일을 못하게 되는 일이 다행스럽기까지 했다. 그래서 나는 감히 다시 편집자를 꿈꾸지 않는다. 내가 단 몇 글자에 범했던 실수와 오만이, 내게는 책 한 권을 뒤덮을 만큼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실수를 인정하고 다음 쇄에서 고치고 앞으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물론 그렇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하면 다시 고칠 수 있는, 이를테면 책처럼 선명하게 내 잘못이 박제되지 않는 곳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 일을 계속한다면 어느 책의 어딘가에서, 내 실수와 잘못을 발견한다면 나는 너무 두려울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편집자를 그만두었다. 물론 그때의 경험으로 배운 것들로 지금 어느 정도 먹고살고 있긴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감사한 일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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