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돌콩 Mar 03. 2023

마음을 주었던 언니가 이사를 갔습니다.

마흔다섯_흔한 이별에도 가슴이 휑해지는 이유.

G동네로 이사를 온 지 올해로 8년 차다. 서울 근교 K도시에 살다 고공행진하는 집값을 못 이겨 이곳 G 동네로 이사를 왔다. 아이는 아프고, 이사 온 집에는 문제가 많고 ( 보일러 고장 + 안방 화장실 누수 + 거실 화장실 배수 문제. 휴...... ), 남편은 이사 한 다음날 부산으로 장기 출장을 떠나고... 지인 한 명 없는 낯선 동네에서 스트레스를 친구 삼아 지내고 있던 때였다.  

 

언니를 처음 만난 건, 아들의 유치원 앞에서였다.  아들이 전학 후 처음으로 견학을 갔는데,  도착 시각이 딜레이 되어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무슨 반이에요?

눈이 커다란 그녀가 말을 걸었다.


혹시 누구 엄마? 아, 우리 아들이 새로 온 친구 얘기 하던데, 반가워요.


어색함이라곤 일도 찾아볼 수 없는 자연스럽고 환한 분위기로 그녀가 인사를 했다.  그 밝은 인사가 반가웠다.

나는 내친김에 그녀를 집으로 초대하기로 했다.

동네 이사 와서 아는 사람 없을 텐데 내가 유치원 엄마 몇 명 데리고 갈게요~


그녀는 유치원 엄마 둘을 데리고 집으로 왔다.  우리는 서로를 소개를 하고, 각자 G동네로 까지 오게 된 사연을 이야기했다.


에구 고생 많이 했겠다.


당황스럽게도 커다란 눈의 그녀는, 내 얘기를 들어주며 끄덕거리다 커다란 눈이 동그래져서는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렸다. 함께 온 엄마 둘도, 아이가 가진 희귀병과 아이가 그렇게 탄생하게 된 스토리, 나의 결혼 이야기와 G도시로 밀려온 이야기를 공감해 주었다. 그 이후 난 그날 방문한 세 명의 엄마들과 절친이 되었다. 모두 나 보다 나이가 많은 언니들이었다.


 우리 사총사는 가끔 티 타임을 갖거나 맛있는 음식을 해 먹으며  추억을 쌓았다. 그러다 사총사 중 나이가 제일 많은 언니가 남편의 일자리 문제로 타 지역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막내를 늦둥이로 아, 젊은 우리 시어머니 나이와 엇비슷하던 그녀는, 그래서 엄마와 같은 포근함으로 나를 보듬어 주던 언니였다.

 

 언니가 이사를 간 후 우리는 그간 쌓았던 정이 무색할 만큼, 사이가 소원해졌다. 커 가는 아이들의 뒷바라지에, 각자의 자기 계발에, 정신없이 보내던 하루는 떨어진 인연을 애타게 찾을 만큼의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큰언니와는 서서히 연락이 끊겨 지금은 카톡 배경 사진으로만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남겨진 우리 삼총사는 서로를 더 끈끈히 여겼고,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전화로~ 커피로~ 밥으로~ 서로를 토닥여 주었다. 가족에게 할 수 없는 힘든 일도 언니들에겐 안심하고 뭐든 털어놓을 수 있었다. 말하자면 내게는 고해성사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특히나 눈이 커다랗던 그 언니는 내게 좋은 의미로 자극이 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무엇이든 열심이었다.  

난 나중에 식빵점이나 했으면 좋겠어.

내가 그렇게 말을 하고, 식빵점을 오픈한 내 모습을  상상하는 사이, 그녀는 매일 실습을 나가더니 제과 제빵사가 되어 있었다.


운동 좀 해야 하는데... 말만 하는 내게 그녀는, 앱을 깔고 30분 뛰기를 매일 해 낸 기록을 보여주었다. 글을 써야지.... 언젠간 써내야지... 하는 내게 그녀는, 부지런히 글쓰기 모임에 나가 책 한 권을 출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말하자면 나와 취미나 생각이 비슷한 사람이었지만 차이가 있다면 실천형 인간이란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모습은 늘 나에게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실은 브런치를 시작하기로 한 것도, 글을 전공하지 않은 그녀가, 글을 써 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글쓰기 동아리에 가입을 하고, 매일 정해진 시간에 글을 써내더니 급기야 자서전을 출간하기에 이르렀을 때였다. 물론 개인 소장용이긴 하지만, 그 꾸준함이 나를 자극했다.


시댁 때문에 우울할 때, 아들의 학교 문제로 속상할 때, 나의 갈길을 찾지 못해 헤맬 때마다 그녀는 통쾌하게 시댁 욕을 해 주고, 진심으로 함께 속상해해 주고, 고민해 주었다. 그랬기에 나에게는 의지의 대상이었고, 편하게 눈물을 보일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었다. 그랬던 그녀마저... 이사를 게 되다니.


언니는 이 동네를 벗어나기 싫어했지만, 이제 중학생이 되는 아들의 진로 문제로 고민하다 어렵게 이사를 결정하게 됐다. 아들이 야구를 너무 좋아해서 야구부가 있는 학교로 가기로 한 것이다. 멀진 않았다. 언니가 지금의 동네로 이사오기 전 살았던 K도시로 다시 가는 것이었다. (아! 그녀와 나는 모두 G 도시로 이사오기 전 K 도시에서 몇 년간 살았다. 그것도 바로 옆 아파트였더라!)


잘 아는 동네이고, 그래서 언제든 맘먹으면 찾아갈 수 있는 거리지만, 처음 이사를 가버린 언니처럼 그렇게 멀어지게 될까 봐 걱정이었다. 무엇보다, 내 지근거리에, 언제든 찾아가 맘 놓고 울 수 있는 존재가 이제 없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하지만, 우리는 성인이고, 무엇보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선택한 이사이기 때문에 축복 속에 언니를 보내기로 했다.


자주 볼 사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서운한 마음도 가시고, 별일 아닌 것처럼 생각됐다. 이삿날이 코앞으로 다가와도 우린 커피를 마시고, 밥을 먹었다. 생각해 보면 이사때문에 처리할 것들이 많아  바빴을 텐데도, 언니는 내가 부르는 족족 나와서 차를 마시고 밥을 먹었다. 그리하여 이사하는 그 주에는 4일을 연달아 보게 되었다. 이사 가는 날 아침, 우리 집에 언니네 아이들을 데려다가 아침을 먹이고, 이삿짐센터에서 포장 이사를 마무리하는 동안 아이들을 돌보게 되었다.


언니는 아이들 편에 00 고기나라 쿠폰들과, 치킨 쿠폰, 족발 쿠폰들을 챙겨 보내었다. 끝까지 챙겨주는 사람...

언니의 아들은 우리 아들에게도 단 하나밖에 없는 친구였다. 유난히 사회성이 약한 아들이 그나마 편하게 이런저런 얘길 주고받을 수 있는... 그런 단 하나뿐인 친구가 이사를 간다는 게 서운할 법도 한데, 대중교통 덕후인 아들은 오히려 친구집에 버스를 타고 찾아갈 수 있다좋아했다. 친구집에 가서 일박 이일을 하고 오겠다며 벌써부터 들떠 있었다. 역시 아이답다.


드디어 이삿짐 꾸리기를 완료하였다는 언니의 전화를 받고, 아이들과 함께, 언니네 집 앞으로 갔다. 삼총사 중 남은 언니도 배웅하러 와있었다.


아이들이 마지막으로 집안을 둘러보고 싶다고 하여 아들과 함께 아이들을 짐이 빠집으로 올려본 낸 다음, 눈이 큰 언니와 남은 한 명의 언니 그리고 나, 우리 삼총사는 이사기념사진을 찍었다. 마침 내가 핸드폰을 막 바꾼 상황이라 동이 어설펐다. 타이머로 돼 있는 줄도 모르고 셀카를 다가 모두 10초 동안 멈춤을 하고서는 그 모습이 너무 웃겨 하하하 웃기 시작했다. 그다음은 사진을 찍는다고 포즈를 취하다가 동영상을 눌러버렸다. 그 모습이 또 웃겨서 우리는 깔깔깔. 그러다가 또 연속 촬영으로 찰칵찰칵.  덕분에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우리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겼다. 그야말로 추억의 한 장을 장식했다. 웃고 있는데도 눈물이 났다. 자주 보면 된다고, 별거 아니라고, 슬프거나 아쉬워하기 싫다던 마음에 갑자기 파도처럼 감정이 밀려왔다. 우린 서로 웃으면서도 울었다.


언니와 아이들이 떠나고, 남은 한 명의 언니와 나는 착잡한 마음을 꾹꾹 눌러 담으며 이런 사람 또 만나기 힘들다를 반복했다. 어디서든 환영받을 사람이지만, 어디서도 다시 못 만날 사람. 내 첫정이고, 내 마음을 주었던 이가 떠난 자리는  먹먹했다. 우린 절대 멀어지지 말자고, 그날 우리 삼총사는 무려 한 달에 5천 원짜리 계를 만들기로 했다. ㅎㅎ 매달 부담 없이 오천 원씩 모아서 몇 달에 한번 만나 맛있는 걸 먹자고.


그렇게 내 마음을 준 언니가 이사를 떠나고,  언니와 함께 했던 이곳에서의 추억들을 떠올려 보는 밤. 이 인연이 끊어지지 않기를... 이사 간 언니에게  좋은 일만 있기를 기도해 본다.







작가의 이전글 그분에게 아이템을 선물 받은 것 같았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