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텃밭에서 김장 배추들을 수확하고, 김장에도 성공하여 그 김치를 지금도 맛나게 먹고 있다. 더위와 모기, 그리고 잡초들을 생각하면 농사짓고 싶은 맘이 사그라들기도 하지만, 김장 생각에 올해도 주말 농장을 하기로 했다.
우리가 일 년 동안 분양을 받은 주말농장은 모 은행에서 운영하는 것으로 약 8평에 해당한다. 분양에 따른 연회비가 5만 원 이하로, 주변 사설 텃밭들이 비슷한 평수에 분양비 15만 원 전 후인 것에 비하면 저렴해서 꽤 인기가 있는 듯했다.
몇 가지 조건을 맞춰야 주말농장 신청의 자격이 주어지는데, 이를테면 올해 새로 체크카드를 발급받거나 하는 것들이었다. 작년에 발급받은 카드가 멀쩡한데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텃밭을 신청하며 갸우뚱한 것은 또 있었다. 바로 연회비 차등지급이라는 항목이었다. 은행에 기여도가 높은 정도에 따라 연회비가 2만 원~5만 원으로 책정된다는 것. 그 기여도라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건지 알 순 없으나, 한마디로 돈을 많이 넣어 은행배를 불려 준 사람에겐 저렴하게 밭을 대여해 준다는 말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기여도가 낮아 가장 높은 연회비를 내야 한 나로서는 다소 씁쓸한 대목이었다.
쳇, 돈 없는 것도 서러운데, 차라리 없는 사람이 더 적은 연회비를 내면 좋지 않나?
그래도 어쨌거나, 주변 시세보다는 훨씬 저렴한 비용으로 텃밭을 꾸릴 수 있으니 불만을 갖지 말자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텃밭에 도착했을 때 씁쓸한 기분을 숨길 수 없었는데, 바로 층층이 피라미드식 텃밭 구조 때문이었다. 아마도, '기여도에 따른 연회비 차등'이란 항목과, 피라미드식 텃밭 구조가 내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연결된 모양이었다.
헐, 텃밭에도 계급사회가 있는 거야?
확인하지도 않은 일인데, 난 제멋대로 그런가 보다고 오해를 해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텃밭이 바로 가장 아래, 평지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계단식의 텃밭 구조, 가장 상위층에 물탱크도 가까이 있다.
사실, 작년에 이곳에서 텃밭을 하면서 그런 생각에 씁쓸해했는데, 그렇다고 어디다 확인해 볼 생각까진 하지 못했다. 우연인지 올해 텃밭도 작년과 같은 위치였다.
텃밭 상부층 위로 올라가 아래를 바라보았다. 가장 낮은 자리에 우리 텃밭이 있다.
작년엔 감히? 올라 가 보지 못하고 올려만 보았던 텃밭 상위층을, 용감하게 한번 올라가 보았다.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풍경이 꽤 괜찮았다. 기분 탓인가? 아래로 내려다보니, 시야가 탁 트여 훤하니 좋았다. 여름이면 초록초록한 기운들이 발아래 펼쳐지겠지?
야~ 윗공기 좋네~
나는 가장 상위 텃밭 둘레를 따라 쭉 한 바퀴 돌아 걸어 내려왔다. 정말, 기여도가 높은 자들이 가장 위층의 텃밭을 차지하게 되는 거라면 이거야 말로 차별 아니야? 괜히 억한 심정이 들었지만, 은행입장에선 VIP 고객과 차별을 두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어쨌거나 저렴하니까...
그래, 이 자리도 어디냐~ 내 땅도 아닌데, 이렇게 저렴한 비용으로 땅을 빌릴 수 있는 것에도 감사하자는 마음으로 밭을 일구기 시작했는데, 작년에도 돌덩이들이 수없이 나오더니, 같은 땅 같은 자리인데 올해도 돌밭이 따로 없다. 돈 없는 사람에겐 이런 얄궂은 땅을 주는 건가? 돌덩이를 주워 나를 때마다 오해와 불만이 눈덩이처럼 커져갔다.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는 건 아니기에 제대로 된 장비가 있을 리 없다. 베란다 텃밭을 일굴 때 쓰던 미니 괭이로 쪼그리고 앉아 돌멩이를 캐고 있자니, 누가 보면 참 미련하게도 일한다 싶겠다.
우리 집 두 남자들은 유난히 더위를 많이 타는 관계로, 삽으로 대충 바위를 닮은 거대한 돌덩이 몇 개를 뽑아 내고는 할 일 다 했다며 차로 후다닥 들어가 버렸다. 홀로 남은 나는 한두 시간을 더 쪼그리고 앉아, 시부렁시부렁~ 이게 텃밭이냐 돌밭이냐~ 저 두 남자와는 다신 농사짓지 않으리~를 반복하며 돌밭을 흙밭으로 탈바꿈시키려고 계속 일했다.
그러고 있다가 곧 우리 밭 근처에 배당받은 한 할아버지가 이 구역의 핵인사라는 것을 알 게 되었다. 찾아와 인사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고랑을 파던 할아버지는 작업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가 지인들과 나누는 대화는 자연스럽게 내 귀에 들리게 되었는데, 덕분에 오해를 어느 정도 풀 수 있었다. 할아버지 지인 중에 가장 상부에 땅을 배정받은 분이 있었던 것이다.
아, 저기 땅이 푹푹 꺼져. 안 좋아요.
그래? 위쪽이 좋을 줄 알았는데?
아니에요. 여기 아래쪽 평지가 젤 좋은 것 같아요. 전 다음에 창구에 말해보려고요. 될지 모르겠지만, 이쪽 아래 땅으로 요청해 보려고요.
오호, 상류층 땅이 좋지 않다니. 그럼 부자들에게만 상류층 땅을 내어준 게 아닐 수도 있겠다. 어쩜 공평하게 랜덤으로 땅을 배정했을 수도 있는데, 괜한 오해를 했다 싶었다.
생각해 보니,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수없이 오해를 하고, 그 오해 때문에 좋았던 사이가 하루아침에 원수가 되기도 한다. 오해가 오해를 낳아 일을 그르치거나, 오해 때문에 울고 맘 상해 하는 일도 많고.
얼마 전엔 지인 한 분이 내가 자신을 왕따 시킨다고 오해를 해서 울고 불고 사람들에게 얘길 해 난처했던 적이 있다. 그때 나야 말로, 제 멋대로 오해를 하고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친 그 사람 때문에 화들짝 놀랐고, 왜 사람들은 제멋대로 오해라는 걸 해서 슬픔의 구렁에 스스로 빠져드는 것인가, 왜 멀쩡히 있던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몰아가는 것인가. 인간관계에 회의를 느낀 적이 있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지 말자고, 오해라는 게 쓸데없는 일임을 경험하고도 나 역시 못난 사람이었던 것이다.
주말농장에 계급이 있다고 오해를 하다니. (물론 말끔히 해소된 것은 아니지만) 이건 아마도 자격지심 때문에 벌어진 일종의 해프닝일지 모른다. 나 스스로 은행에 기여도가 낮은 사람임을 확인받고 나니 괜히 서러워서 말이다. 상위층 땅이 마냥 좋은 건 아니라니, 돌덩이를 주워 담던 불만 가득하던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난 참 웃긴 인간이다.
돌을 줍고 또 줍고, 땅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큰 돌을 어느 정도 줍고 나니, 벌써 해가 높이 떠서 얼굴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땅을 그만 고르고 이제 거름을 가져와 흙과 고루 섞어 줄 차례였다. 차로 피신한 두 남자는 낮잠과 오락으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헛, 어느 자리에나 일 복 많은 사람은 따로 있지. 두 남자에게 눈으로 뜨거운 레이저 몇 방 쏘아 주자 슬금슬금 눈치 보며 차에서 나왔다. 나는 남자들에게 거름을 찾아보라고 했다. 그런데 아뿔싸! 어제 무료로 들어온다던 거름이 하루 만에 다 소진되어 우리에게 돌아올 거름이 남아있지 않았다. 어쩐지, 농장으로 들어설 때 꾸리꾸리한 냄새가 나질 않더라니... 곧 비가 온다는데, 거름을 뿌려 놓아야 할 것 같아서 급한 데로 근처 농약사에 가서 거름 몇 포대를 구매했다. 아까비~
아빠와 아들, 두 남자는 거름을 자루째 땅에 툭 툭 놓더니 삽으로 대충 거름을 뿌리고는 흙과 휙휙 섞더니만 일이 끝났다며 차로 또 후다닥. 옛날 어른들 잘하던 말씀처럼 '차에 꿀 발라 놨냐?'는 말이 절로 나왔다. 특히 큰 남자! 나이 들면 귀농이나 할까? 그런 말 하기만 해라.
어쨌거나, 거름을 주고, 흙과 섞어 텃밭의 기초를 완성하였다. 곧 비까지 내려준다니 땅에 영양분이 골고루 섞이겠다. 올해도 이 땅에서 바른 먹거리들을 키워내며 내 정신 수양도 함께 잘해나가야지. 모기에게 수백 번 헌혈하고, 땀냄새 폴폴 풍기며 일요일 아침을 시골냄새 가득 맡으며 시작하겠지만, 그 수고스러움을 한방에 날려 줄 수확의 기쁨을 맛볼 날이 곧 올 테니까.
쓸데없는 추측과 오해로 못난 생각들을 하며 시간낭비하지 말고, 주어진 조건에 만족하며 좋은 생각들로 파릇파릇한 인생을 살아가야겠다. 랄랄라~ 올 상반기엔 어떤 작물을 길러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