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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콩 May 02. 2023

그 총각, 나도 불러 봤습니다.

마흔다섯_버리지 못했던 삶에 대하여...

 지역 커뮤니티에 유명한 총각이 있다. 인기가 꽤 좋아서 그를 만나려면 일단 집 주소와 함께 문자를 남겨야 한다. 총각의 전화번호를 입수하고 며칠 고민한 끝에 문자를 보냈다.  대략 2시간쯤 지나자, 답장이 왔다. 5일 뒤, 오전에 집으로 찾아온단다. 전화 한 통 없이 간단하게 약속이 정해졌다. 마음이 분주하다. 온 집안의 옷들은 죄다 꺼내어 본다. 혹 애매한 것들이 있다면 직접 입어보기도 하고 말이다. 


 심각한 결정장애가 있는 나는, 그래서 무언가를 버려야 할 때 장고를 하는 편이다. 혹시라도 옷을 버렸다가 나중에 필요할 때가 생기면 어쩌지? 그래서 결혼 전 입었던 재킷, 원피스까지도 옷장에 한 자리를 차지하여 마치 옷장 속 내 옷들은 압축팩에 눌려진 옷들처럼 낑낑거리며 납작하게 빈틈없이 끼어 있었다. 결혼 전에 비해 무려 15kg이 늘어난 몸이라 지금은 도저히 입을 수 없는 옷들인데도, 혹시나~ 혹시나 살이 빠지고 나면 입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버리질 못했다. 15년째 제자리걸음인, 아니 오히려 더 늘기만 한 살이 하루아침에 빠질 리도 없는데... tv프로그램에서 정리정돈 전문가들이 1~2년 동안 단 한 번도 입지 않은 옷들은 앞으로도 입을 일이 없다고, 버리라 그렇게 입이 닳도록 말하더라만 어쩜 그 말을 듣고도 옷장 속 비우기가 어렵던지. 


 가방도 마찬가지다. 명품가방 하나 시원하게 지르지 못한 나는 대신 책을 주문하고 받은 사은품 가방이나 저렴한 여러 종류의 가방을 소유하고 있었다. 종류가 여러 개일뿐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사실 쓸만한 가방은 한 개도 없었다. 책을 사고 사은품으로 받은, 손잡이가 짧고 입구가 넓은 팥죽색 가방은 책 담기가 편해서, 길쭉하고 제법 크며 가벼운 검정 에코백은 장 볼 때 편해서, 흰색 크로스백은 핸드폰 넣기가 편해서, 카키색 책가방은 연애시절 주야장천 메고 다니던 추억의 가방이라서, 반달 모양의 크로스백은 월급 받고 내 돈으로 처음 사 본 소가죽 가방이라서, 갈색 명품 가방은 선물 받은 것이라서 버릴 수가 없었다. 

 하도 얄궂은 가방만 들고 다니는 나를 보다 못한 친한 언니가 '학부모 면담 때는 명품가방 들고 가는 게 국률'이라며 본인이 쓰지 않고 있는, 메이드인 이태리 가방을 넘겨주었다. 기저귀 가방만 한 그 가방은 아담한 내 키에는 부담스러운 크기여서 몇 번 들지 못했는데, 내가 갖고 있는 유일한 명품 가방이란 이유로 정리할 수가 없었다. 청바지를 리폼해 만들거나 하여 내 손으로 만든 에코백이 또 서 네 있고, 일할 때 노트북을 넣어 메고 다니던 백팩 도 두어 개 있었다. 이렇게 가방이 넘쳐나는데도 정작 외출할 때마다 '들고 갈 가방이 없어'를, 마치 외출준비의 루틴처럼 중얼거리며 이 가방, 저 가방을 메어 보며 꿀꿀해하곤 했다. 


  내가 버릴 수 없었던 것은 비단 물건의 영역만은 아니었다. 예전에 내가 일할 때만 해도... 내가 결혼 전만 해도... 그런 말들을 달고 사는 요즘. 정작 버려야 할 것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예전의 영광인데 그걸 알면서도 나는 여전히 반짝반짝 빛났던 젊은 시절을 그리워만 하고 있었다. 다시 일에 복귀하기 힘든 현실이라는 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과거를 버리지 못한 나는, 그래서 늘 뭔가 아쉽고, 우울했다. 


 버려야 하는데, 정리해야 하는 데를 입버릇처럼 달고 살다가, 얼마 전 지역 커뮤니티에서 버리려던 헌 옷을 모아 간식비를 벌었다는 이야길 보게 되었다. 헌 옷을 수거해 가는 총각이 있는데, 인기가 꽤 높아서 예약을 하고 일주일 정도 기다려야 만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헌 옷을 버리고 돈을 벌 수 있다니, 그것도 직접 수거해 간다는데, 괜찮은 것 같다. 허, 그 총각 나도 한번 만나 볼까?  "그래 나도 이 기회에 옷 정리도 하고 커피 값이라도 벌자".

 

 나는 지역커뮤니티에 물어 총각의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그리고 문자로 집 주소를 보내었다. 두 시간쯤 지나자 총각이 문자로 자세한 설명과 함께 헌 옷 수거 조건을 보내왔다. 헌 옷과 신발, 가방 합 무게가 20kg 넘을 것. 20 킬로그램이 넘지 않을 시엔 무상수거 가능. 냄비, 프라이팬 가능, 이불류 수거 불가 등의 안내사항이었다. 

 20kg을 채울 수 있을까? 나는 일단 그동안 버릴까 말까 고민했던 옷들을 죄다 모아 보았다. 박스에 담아 무게를 재어 보았다. 10kg이 안된다. 그래도 신발과 가방까지 정리해 보면 20kg이 되지 않을까? 우선 예약부터 잡고, 총각이 오기 전에 헌 옷을 더 채워보자는 심산으로 나는 헌 옷 수거를 예약했다. 5일 후 오전으로 수거 일정이 잡혔다. 

 

 헌 옷을 가져간다는 총각에게 예약을 하고 나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평소 같았으면 재활용 박스에 담았다가도 고민의 늪에서 다시 기사 회생 되었을 옷들이 심플하게 버림 박스에 담겼다. 20kg이 넘어야 한다는 게 헌 옷 수거의 조건이다 보니 그람수를 채워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겨 선택이 더 쉬웠다. 아직은 입을 만 한데? 하는 옷들도 무게를 채우려는 생각에 쉽게 버려졌다. 몇 백 원 더 벌어 뭐 하려고 싶으면서도 이상하게 버림 박스를 꽉 채우고 싶은 욕구가 생기더라.


 옷장을 두 어번 뒤집고 나서 이번엔 주방으로 갔다. 냄비나 프라이팬도 kg당 몇 백 원씩 돌려준다니 as를 보내려다 몇 년째 방치하고 있는 압력솥과 다음에 혹 튀김 할 일이 있을 때 쓰고 버려야지 하고 두었던, 바닥 긁힘 심한 프라이팬도 큰 고민 없이 싱크대 밖으로 끄집어낼 수 있었다. 

안 신는 신발과 가방, 낡은 카펫까지 모으고 모아 봤지만 20kg에 살짝 못 미쳤다. 수거 예약을 취소해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 구세주처럼 동네 동생이 헌 옷을 한가득 들고 나타났다. 아이고 기특해라.


 헌 옷을 수거하는 총각은 약속시각보다 조금 일찍 저울을 들고 나타났다. 실제 총각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는 외모였지만, 그는 시원시원하게 헌 옷을 자루에 옮겨 담았다. 노란색 큰 자루에 헌 옷들이 가득 담기고, 무게가 측정되었다. 두둥! 35kg! 짝짝짝. 동생이 가져온 헌 옷 무게가 더해지자 20킬로를 넘어 35 킬로그램이 되었다. 후~ 다행이다. 

 헌 옷 35kg과 냄비 4kg의 값은 15200원. 이 많은 헌 옷을 내어 주고, 커피값을 벌었다. 둘이 합해 15200원. 고작만 원도 안 되는 돈을 벌려고 온 집안을 몇 번이고 뒤집어 헌 옷을 채웠나 싶은 마음에 약간의 뿌듯함과 동시에 허탈감도 들었다.  어쨌거나 덕분에 저장강박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버리지 못하고 모으기만 했던, 그래서 꽉꽉 차 있던 옷장에 숨 쉴 틈이 주어졌다. 옷장 문을 열 때마다 답답하던 마음에도 바람이 들어왔다. 


  그동안은 버리는 게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 버릴까 말까 뭐가 그리 고민이었을까. 게으름의 문제였을까, 마음의 문제였을까. 


 동네 동생과 나는 나름 의미 있게 번 이 돈을, 의미 있게 쓰기로 했다. 약간의 고민 끝에 우리는 최근 남편의 빚 문제로 속앓이를 하고 있는 동네 언니를 불러 맛있는 밥을 사 주기로 했다. 매콤하기로 소문난 동네 코다리집 점심 특선이 일인 15000원, 딱이었다.! 

 우리는 매콤한 코다리를 먹으며 헌 옷을 정리한 후기를 나누었다. 생각하면 백 원이라도 더 벌어보려고 고민 없이 옷을 끄집어내던 과감함이 어디서 나왔는지도 모르겠고, 그렇게 몇 날 며칠 집안을 뒤집어 꼴랑 일인당 만원도 벌지 못 했다는 게 어이없기도 했다. 하지만, 동생도 나도 십여 년간 버리지 못하던 옷을 고작 몇 백 원 더 벌어보겠다고 정리할 수 있었으니, 스스로는 못하던 일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지역 커뮤니티에서 총각의 인기를 드높인 이유가 아니겠냐고.

  

 15200원을 벌고, 점심값으로 45000원을 지출했다. 이 또한 생각해 보면 헛웃음이 나는 일이지만, 그래도 헌 옷을 정리한 그 돈이 누군가를 위로하는 따신 밥값이 되었고, 또 집안 정리도 되었으니 우리의 헌 옷 정리는 '보람'이란 단어로 아름답게 마무리된 걸로 하자. 작심하고 헌 옷을 정리해 낸 것처럼, 과거에 연연하고 있는 내 머릿속도 대대적으로 정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내 머릿속 옷장에도 꽉 끼는 낡은 옷이 아닌, 현재 내 몸에 걸맞는 새 옷이, 새로운 생각들이 채워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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