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도 일해! 아들의 말에 눈물이 났습니다.

(2) 내가 설 곳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by 돌콩
나도 지혜누나처럼 학원에 갔다가 밤늦게 집에 들어오고 싶어
엄마는 왜 일 안 해?


늦은 밤, 공부 문제로 한 보따리 잔소리를 들은 아들이 말했다.

엄마도 일해!




나는 충격을 먹어 한동안 움직이질 못했다. 그런 나의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아들은 움찔하더니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러고 사는데'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나는 아이에게 상처를 주기 싫은 '엄마' 니까, 어금니를 꽉 깨물며 참았다.


너 챙겨주고, 공부 가르쳐 주느라 엄마가 일을 쉬고 있는 거지~
나 이제 알아서 잘해, 그러니까 엄마도 일 나가!


눈치 없는 아들이 말했다. 2차 충격이다. 나는 들고 간 간식을 아들의 책상 위에 조용히 내려놓고 뒤돌아 후다닥 아들 방을 나왔다. 왠지 서럽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한 감정이 동시에 들었다.


안방 화장실로 가서 문을 닫고 변기 위에 앉았다. 화가 났다. 이놈의 자식이, 진짜 내가 누구 때문에 이러고 사는데. 화장실 타일 바닥을 보며 그 말을 내뱉었다.

나직했지만 꾹꾹 눌러져 나온 그 말은 묵직해 울리지도 않았다. 눈물이 막 났다. 나는 훌쩍이다 옆에 있는 화장지에 손을 뻗어 휴지를 한 움큼 뜯어냈다. 그러고는 코를 팽! 풀었다.


으에엥~.


나는 떼쓰는 아이같이 입을 으앙 벌리고 엉엉 울다.


마음에 폭우가 내렸다.


15년 동안 참아왔던 설움이 폭발 건가? 휴지를 가득 들고 입을 틀어막으며 울었다. 아들에게 우는 모습을 들키고 싶진 않았다. 그러고 있다 갑자기 뜬금없이, 저 '발리에서 생긴 일' 드라마에서 조인성이 울던 영상이 스쳐 픽! 웃었다. 조인성이 입안에 진짜 주먹을 넣었던가 아니던가. 하, 어이없는 전개는 뭐람. 덕분에 울음이 뚝.

세수를 하는데 또 눈물이 찔끔 나길래 거칠게 세수하며 눈을 비볐다. 나는 어푸어푸 소리대신 '서운해, 서운해'를 읊조렸다. 서운해. 서운해, 너무 서운해....




아이를 낳기 전 나는 방송작가로 일했다. 뭐 '잘 나갔던 '이라고 쓸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프로덕션과 메인 방송사를 오가며 방송국의 굵직한 대표 프로그램들을 집필했다.

스크린샷 2023-10-19 222924.jpg 내가 썼던 대본들... 어느 날인가 서러운 마음에 죄다 버려버렸다.


그러다 꿈에 그리던, 당시에 꽤 핫했던 프로그램을 하게 되었는데, 일이 힘들어 밤새기 일쑤였다. 잠깐 씻으러 돌아온 집에서 철퍼덕 침대에 잠깐 누웠다가 여기저기 뻐근한 몸을 겨우 일으킬 때는 눈물이 절로 날 만큼 힘들었었다. 그 힘든 프로그램을 맡은 지 삼 개월쯤 되었을 때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황스러웠다. 나는 뱃속 아기의 건강을 위해 곧 그 프로그램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케이블 방송 다큐를 하나 맡았다. 자동차 관련 1시간짜리 다큐물이었다. 한창 입덧이 심해서 테이프를 보다가 화장실로 가서 토를 하고 다시 테이프를 보길 반복했었지.


중간에 잠깐 지역방송 프로그램도 하나 했다. 업무가 과하지 않아 알바처럼 일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거기서 8개월 만삭 때까지 일했는데, 나는 막달까지도 일하고 싶었지만 너무나 (지금 생각하면 비정상적으로 배가 나왔던 것 같지만) 부풀어 오른 내 배를, 보는 사람들이 부담스러워해서 그만두었다. 그리고 아이를 낳았고, 출산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나는 의사들이 교과에서나 배운다는 난출산의 과정을 하나도 아니고 여러 개를 한 번에 겪으며 말 그대로 '애 낳다 죽을 뻔'했다. 태반조기박리로 아이를 응급제왕절개 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아이는 '수포성표피박리증'이라는 희귀 피부질환을 갖고 다리 피부가 한 겹 벗겨진 채로 세상에 나왔다. 아이를 낳은 나는 지혈이 되지 않아 대학병원에 이송되었는데 중간에 과다출혈로 쇼크가 왔었다. 자궁과 한쪽 난소를 잃은 후에야 살아났고, 아이와 나는 각각 다른 대학병원의 중환자실에서 사투를 벌였다.


뭐 이런, 들으면 입이 쩍 벌어지는 나의 출산 이야기와 희귀 질환인 아이를 키우며 겪은 스토리는 눈물 없이 들을 수 없지만, 각설하고. 여하튼 치료약도 없는 희귀 질환의 아이를 키우며 나는 때론 의사 선생님이, 때론 간호사가 되어 아이를 치료해야 했다. 다치더라도 일반 밴드하나 사용할 수 없는 아이를 유치원과 학교에 보내면서 나는 늘 5분 대기조의 마음으로 집순이 생활을 해야 했다.


작가일과는 당연히 멀어졌다. 아이가 네 살쯤 되었을 때,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어 (남편도 실직한 상태였고) 다시 일을 슬슬 해볼까 생각했다. 마침 평일에 재택근무를 하고, 토요일에 녹화를 가면 되는 (지금생각하면 다시없을 꿀 job) 일을 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일을 하려니 쉽지 않았지만 어찌어찌 몇 개월을 버텼는데, 그 사이 아이는 이상한 불안증세를 보였다. 대학병원 두 곳을 예약하고 검사를 받으러 다녔다.


한 곳에서는 전형적인 아스퍼거 증세라고 일반 학교에 못 갈 것이다 진단했고, 다른 곳에서는 자폐가 절대 아니며 오히려 지능이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했다. 오잉? 6살에 한글을 절로 뗀 애가 지능이 낮다니? 에잇. 명의라 소문난 두 선생님들의 진단 결과가 이렇게 다를 수 있는 건가?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 쫌! 희귀병 하나로도 너무 힘든 인생이라고!


나는 곧 일을 다시 그만두고, 아이에게 올인하기로 했다. 놀이치료, 언어치료, 감통치료, 인지치료... 매일 아이를 데리고 치료실로 출근하다시피 했다. 통장은 구멍이 났고 약관 대출과 현금서비스를 받아가며 겨우겨우 아이의 치료를 이어나갔다.

그때 출산을 하다 내가 죽어서 지금이 지옥인 게 아닐까?


날마다 나는 내일이 오지 않길 빌었다. 눈 뜨고 있는 모든 순간이 고통이었다. 그런 고통의 시간을 견뎌왔단 말이다. 매일 울면서도 혹여나 나의 이런 우울함이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지나 않을까. 힘들어도 아이 앞에서 펑펑 울지도 못했다. 그렇게 키운 너였다. 나의 모든 에너지를 쏟고 나의 모든 청춘을 받쳐서!


아들을 이만큼 키워냈잖아. 그걸로 된 거지 뭐...


아들을 일반학교에 보내고 초등학교를 무사히 졸업, 중학교에 입학하기까지 별별 맘고생 다 겪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아이가 사회 속에 커 나갈 수 있는 게 어디냐며, 나는 나의 젊은 날을 그렇게 보낸 것에 대해 아쉬워하지 않기로 다짐했었다.


그런데, ' 엄마도 일해.' 하는 아이의 말에 나의 30대, 그 청춘의 시간이 바스락 부서져 사라졌다.




아이에게 무엇을 바랐던 건 아니다. 적어도 엄마의 헌신을 알아봐 주길 바랐다거나, 엄마의 인생을 아이를 통해 보상받길 바랐던 게 아니라고. 오히려 나 때문에, 이런 엄마 아빠 때문에 온 인생이 고통 속인 아이에게 미안해하기만 했다. 그런데, 그랬다면서... 나는 왜 이렇게 서운하고 슬픈 것일까.

내가 일을 하고야 만다.


억울한 심정이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주변인들에게 '이제 일해도 되지 않아?' 하는 말을 자주 듣고 있던 터였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나를 보통의 아줌마 반열에 올려놓는 것 같아 서운했다. 얼마나 많은 감정들을 추스르고 이겨내고 참고 사는데, 아픈 아이를 키운다는 게 보통의 삶과는 얼마나 다른데 ' 애 키우느라 다들 경력단절이 되지, 하지만 이제 애도 컸는데 학원비 벌어야지~'라며 전형적인 경단녀의 틀에 나를 포함시키는 게 못내 서운했다.

애 덕분에 쉰 건 맞지 뭐.


항상 얘기하던, 비 자발적 경단녀. 나는 늘, 일이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지 않냐고, 나는 일이 싫어서 그만둔 게 아니고 상황 때문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고 나를 해명하고 다녔다. 글쎄, 나 능력 없는 여자 아니고 어쩔 수 없이 쉬고 있는 거다 얘기하고 싶었을까?


그런데 이젠 정말 상황이 달라졌다. 아이가 스스로 자기 피부를 치료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아이를 학원에 보내지 않고 직접 지도를 한다는 것도 내가 집에 있는 한 가지 이유였지만, 공부 가리키는 시간보다 애와 싸우는 시간이 더 많아지면서 올 초부턴 아이 공부도 인강으로 돌렸던 터였다.


게다가 특이하게 아들은 세탁기 돌리기와 밥 짓기를 좋아했다. 요리에 관심이 많아 달걀 프라이도 할 줄 알고 우동도 끓여 먹을 줄 안다. 이제 엄마의 돌봄 없이도 생활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 한마디로, 내가 이제는 정말 일하러 갈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내가 설 곳을 잃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이제 나는 뭘 해야 할까. 아이의 치료사로, 선생님으로, 엄마로 그 역할을 해 오느라 경력 단절이 된 십 년이 넘었다.


막막했다. 일하라고 무언의 압박을 느끼게 해 준 이웃들과 아들에게 보란 듯이 멋있는 일자리로 재기에 성공하고 싶었다.


작가일을 다시 할 수 있을까? 시켜주는 이도, 일도 없는데 내심 여의도에서 상암으로 멀어진 방송국이 못내 아쉬웠다. 아픈 아이를 키우다 보니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방송일을 할 때 알던 사람들과는 멀어져 일을 부탁할 사람도 없었다. 나는 밤마다 작가협회 구인란을 열어보았다.

일을 할 수 있을까?


마음속에 그 말이 파고들면 답답하고 서글퍼 눈물이 났다. 젠장. 경력단절 되는 동안 눈물만 늘었나 보다.


뭔가 해야 할 것 같고 일할 상황이 되었는데 정작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조바심만 났다. 불안했다. 자꾸 아들에게 화가 났다. 정작 문제는 내게 있으면서 말이다.


우선은 이력서부터 정리해 두기로 했다. 사실 작가일을 십 년 정도 하면서 이력서를 작성할 일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 일 하던 PD 혹은 작가와 다시 일하거나, 소개로 일이 연결되었기 때문에 굳이 이력서가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우선 과거에 집필했던 프로그램을 정리하고, 나름의 '이력서'라는 것을 작성해 보기로 했다.


오랜만에 노트북을 켜고, 한글문서를 열었다.

얘 왜 이래?


하, 어이가 없다. 노트북이 버벅대며 말썽이다.

마지막 일을 하고 구입한, 그때는 새 노트북이었던, 어느새 십 년 차 나이만 먹은 헌 노트이다.

그래, 너도 오래 쉬었지.


이력서고 뭐고 당장 노트북부터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 되고 보니 짜증이 치밀었다. 시작부터 순탄치 않구나 싶다.

후....


한숨 크게 한번 쉬고, 노트북을 닫았다. 편에게 부탁해 노트북을 A/S 보내고, 노트북이 치료받는 동안 곰곰이 생각해 보기로 했다. 작가 일을 어떻게든 다시 시작해 볼 것인가, 새로운 일을 찾아볼 것인가.


아아... 모르겠다. 뭐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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