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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새 Dec 04. 2023

배수의 끈적한 진을 치고 가늘게 가라

악기를 배우기 시작해서 꾸준히 성장하고 실력이 향상되며 즐기는 단계까지 이르는 확률이 얼마나 될까? 모르긴 해도 내가 주변에서 보고 매스컴을 통해 느끼기에는 10% 미만인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은 중간도 못 가서 열정이 식고, 자신의 볼품없는 모습을 자각하여 한숨을 쉬고 현실로 돌아온다.


재능도 마찬가지다. 물질적 성과를 떠나서 그 일로 삶을 즐기는가를 기준으로 봐도 재능을 실현하는 사람은 10%를 넘지 못하는 것 같다. 왜 그럴까? 재능은 처음에 열매를 맺은 완성된 생명체가 아니라 씨앗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씨앗을 가지고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농사를 지어야 하는 수고로움이 필요하다. 농사를 짓는 동안 가뭄이나 장마도 올 것이고, 추위, 야생동물의 습격 등 다양한 장애물이 있을 것이다. 이런 외부적인 장애물 말고도 농사짓는 법을 몰라 어린 싹을 죽이기도 한다. 


특히 이미 어른이 된 후에 재능꽃을 피워보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이런 장애물을 담담히 받아들일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 어른은 더 이상 부모의 보호나 지원을 받지 못한다.  스스로 생계를 책임지며, 때로는 가족까지 부양하며 재능 농사를 지어야 한다. 그러니 그 농사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다. '나답지 않은 삶을 살아도 그저 등 따시고 배부르면 만족한다'라고 말한다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재능의 씨앗을 간직한 채 껍데기인 나만을 부여잡고 공허하고 건조한 삶을 산다면, 그런 삶이 싫다면 힘이 들어도 재능 농사를 지어야 한다.


재능 농사는 운이 좋아 결실을 빨리 맺을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시간이 많이 걸리므로 계백 장군이 황산벌 전투에서 쳤던 그런 무모한 배수의 진은 곤란하다. 그보다는 가늘더라도 끈질기게 포기하지 않는 끈적끈적한 배수의 진이 필요하다. 악기를 예로 들면 시간이 없어도 적어도 하루에 20분은 무조건 악기 연습에 할애하겠다는 그런 마인드다.  3년간 산속 동굴에 들어가 기타만 친다고 기타 천재로 거듭나지는 않는다. 아마 골병이 먼저 들 것이다.


재능 농사가 언제나 기쁨과 영감이 충만하리라는 기대는 금물이다. 재능을 키워가는 과정에서는 내 감정이 메마를 때, 맹숭맹숭할 때도 있고, 하기 싫을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도 어떻게든 방법을 연구해서 그 언저리를 기웃거리는 게 중요하다. 싫든 좋든 오래 살아서 부부가 정이 들었듯이 '이런 건 딱 질색이야. 이혼해 버려야지' 하는 마음으로 재능을 대한다면 재능이 뿌리내릴 시간과 터전이 안 생길 것이다.


삶은 언제나 빛과 어둠이 공존하고 가까이 있는 것 같다. 죽음과 생명이 가까이 있고, 지드래곤이 '수만 명이 환호하는 무대가 끝나면 호텔방에서 컵라면 끓여먹고 혼자 영화 한 편을 보고 잠들곤 하는데, 그 공허함이 일반인보다 크다'라고 말했듯 공허함과 화려함도 가까이 있다. 


그러니 재능의 밝은 열매만을 바라면서 재능의 어두운 면을 외면하려 하지 말자. 하기 싫고 무기력한 순간에도 당황하거나 그 상황을 부정하지 말고, '이 순간도 지나가리라' 하면서 인정하자. 찬란한 것, 인정받는 것, 화려한 것, 주목받는 것, 많은 수익을 내는 것보다 마음의 교감이 더 중요하다. 우리가 가진 재능을 통해 내 마음이 삶과 교감하는 것, 내가 진짜 삶을 살고 있다는 느낌이 훨씬 중요하다.


하루 4시간 이상 완벽한 테크닉을 위해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는 피아니스트가 매일 우울증 약을 먹고 있다면 그 피아니스트는 실수없는 연주를 하더라도 음악을 통해 삶의 위안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음악을 그만둔다고 우울이 걷히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음악(연습)을 대하는 자세. 완벽에 대한 강박보다는 악기와 교감하고, 처음에 음악에 대해 가졌던 첫사랑의 마음을 회복하는 게 중요할 것이다. 


차승원을 비롯해 친구가 없다는 연예인이 제법 있다. 차승원뿐만 아니라 대부분, 나이가 들수록 진정한 의미의 친구는 사실 몇 명 없는 것 같다. 재능을 포기하고, 친구도 없다면 무엇으로 삶의 낙을 삼을 것인가? - 가족은 예외로 하자 - 술? 돈?


재능은 결국 내가 선택한 삶의 친구다. 그것을 통해 실제 인간 친구를 얻기도 한다. 거미줄같이 끈적한 배수의 진을 치고 가늘게 가 보자. 큰 성과를 얻지 못해도 좋다. 스스로에게 충실했다면. 연예인들이 본케 외에 그림을 그리고, 귀촌 생활을 하는 등 다양한 자신만의 삶을 사는 게 보기 좋다. 나 또한 그런 삶을 살려면 내 삶과 재능을 끈적하고 가늘고 긴 애정으로 품어줘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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