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 글쟁이와 아마추어 연주자라는 타이틀을 걸며 이제 딴따라 인생을 살겠다고 허세부린 내게 동기가 한 말이다.
'내가 그랬나?'
의문이 든다.
생각 없이 주고받은 안부에서 뭔가 달라진 상대의 생기를 느끼면 왠지 나만 처진 것 같은 고립감이 든다. 매번 같은 모양의 시간이 지겨울 만큼 무기력할 때쯤 누군가가 전하는 열정은 부러움과 함께 스멀스멀 질투를 끌어 올린다. 뭐라도 해야지 싶지만, 그것도 잠시 생각이 행동으로 옮겨가는 한 발자국을 떼기 전에 핑계와 변명이 진을 친다. 행동이라는 출발은 매번 귀차니즘으로 주저앉는다.
일전에 대장내시경을 했을 때 몇 개의 용종을 떼냈다. 의사는 작은 이벤트라고 표현했다. 위중하지 않지만, 정상이 아닌 상태를 이벤트라 하는구나. 나쁘지 않았다. 수술보다 가벼운 시술도 당사자에겐 무거운데 이벤트는 깃털 같아 별일도 우스워지게 했다.
누구나 그렇고 그런 삶과 이벤트에 조금씩 닳는다. 자녀가 조금 더 크고 내가 조금 더 벌면 나에게 집중할 시간이 올 거라 믿었다. 하지만 아침마다 출근은 반사작용이고 그곳에서의 이름은 생계형이다. 의도와 비의도가 섞인 안팎의 행사와 모임은 건너뜀이 없다. 해야 할 일은 안과 밖 어디서나 매일 해도 매일 잔류가 남는다. 집안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다는 어른의 말이 영락없다.
원래 일이라는 게 하는 사람만 계속이고 한량은 영원한 한량이다.
바로 그거다. 노비 근성. 어딜가나 엉덩이를 느긋하게 붙이고 앉는 게 거북해서 냉큼 일어나 움직여야 편한, 고되다 말은 안 해도 당연히 알아주길 바라면서 참는 게 습관이 돼버린, 에둘러말해 '내가 하고 마는 게 편해'라는 그 근성은 오래 몸에 밴 잣대에 어긋나면 안 된다는 강박감과 세뇌가 일순 아니었을까. 이런 사람에겐 말 한마디와 거들어주는 행동 한 번이 쉽게 은혜가 된다.
충분한 사랑과 인정이라는 영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언제나 결핍과 갈증 상태다.
번아웃으로 고갈된 몸이 뭘 말하는지 몰라 한약을 먹고 링거를 맞으며 ‘나이 드나 봐’ 애매한 핑계를 댄다. 몸은 당신의 정신이 고갈되었다고 경고하는데 우리는 몸이 아픈 줄 안다.
등가죽이 바닥에 붙은듯한 극강의 무기력에 묶인 뒤에야 나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 나였음을 안다. 죽었다 부활한 예수를 직접 눈으로 봐야 믿겠다는 도마처럼 우린 보이지 않는 것을 쉽게 불신한다.
가만히 눈을 감고 귀를 열어보면 안다.
세상의 소음이 일제히 떠들다가 어느 순간 아득해지면 '나'라는 나레이터의 속삭임이 들린다. 공상과 잡생각이 몰려들어도 내젓지 말고 그냥 두어야 한다. 호흡을 아주 깊이 하고 천천히 집중하면 은밀한 목소리가 들린다. 누군가는 신의 소리, 자아의 인식 등 이름을 붙이겠지만 중요한 건 듣는다는 사실이다. 대부분 우리는 죽음을 직감한 때에라야 비로소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세상이 너무 빠르고 소란스럽다. 조용한 시간이 어색해 텔레비전, 핸드폰, 인터넷으로 항상 볼륨이 켜져있어야 안심한다. 언제부턴가 우린 고요 속의 목소리를 두려워하고 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