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커튼을 젖히니 새로 심은 채소 모종들이 햇살을 받아 싱그럽게 빛나고 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추위에 움츠리던 모종들이 이제는 생기를 되찾은 모양이다. 베란다 한 켠을 내어 심은 상추와 방울토마토, 고추들이 서로 키 자랑을 하듯 쑥쑥 자라고 있다.
도시 한복판 콘크리트 숲에서 이렇게라도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는 건 내게 작은 위안이다. 물을 주다 문득 생각했다. 이 작은 씨앗들은 어떻게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을까?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어떻게 자라야 할 방향을 정확히 알고 있을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다시 꺼내 읽은 건 큰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하던 날이었다. 학교 입구에서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아이를 보내고, 집에 돌아와 혼자가 된 거실에서 문득 서른 몇 해 전, 내가 고등학생이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 국어 선생님이 읽으라고 권했던 책이었다. 먼지 쌓인 책장 깊숙한 곳에서 꺼낸 책의 중간쯤, 형광펜으로 밑줄 그어놓은 이 문장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얼마나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진리인가.
이제 오십이 가까운 나이. 청소년기의 혼란을 겪고 있는 아이를 키우는 나에게, 그리고 여전히 내면의 목소리를 찾아 헤매는 나 자신에게, 이 문장은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데미안』이야기
'데미안'은 소년 에밀 싱클레어의 성장기를 그린 소설이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 독일을 배경으로, 주인공의 유년기부터 청년기까지 영혼의 성장 여정을 따라간다. 뭐랄까, 영혼의 사춘기와 그 아픈 성장통을 그린 이야기라고나 할까.
열살의 싱클레어는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의 착한 아이다. 그런데 어느 날, 더 나이 많은 프란츠 크로머에게 허풍을 떨다가 협박을 당하게 된다. 요즘 말로 하면 학교 폭력의 피해자가 된 것이다. 어린 싱클레어는 빛의 세계(가족의 안전하고 도덕적인 세계)와 어둠의 세계(거짓말, 범죄, 폭력이 존재하는 세계) 사이에서 혼란을 느낀다.
이때 전학생 막스 데미안이 등장한다. 신비로운 분위기의 데미안은 싱클레어를 크로머의 괴롭힘에서 구해주고, 그에게 전혀 다른 세계관을 보여준다.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재해석하면서 "카인이 정말 악한 사람이었을까?"라고 묻는 데미안. 지금이라면 SNS에서 "왜 우린 항상 피해자 편만 들어요? 가해자 입장도 생각해봐야죠"라는 논쟁을 불러일으킬 만한 발언이다. 하지만 데미안은 단순히 도발적인 게 아니라, 전통적 가치관에 의문을 제기하고 자신만의 내면의 목소리를 찾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청소년기에 접어든 싱클레어는 방황한다. 학업을 소홀히 하고 술에 빠지기도 한다. 오늘날로 치면 게임 중독에 빠지거나 불법 음주를 하는 10대 청소년과 다를 바 없다. 그러다 우연히 오르간 소리에 이끌려 들어간 교회에서 아름다운 여인의 초상화를 보게 된다. 이 여인의 이미지는 싱클레어의 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그는 이 초상화를 그려 데미안에게 보낸다.
놀랍게도 데미안은 그림을 받고 "이 여인은 당신이 찾고 있는 당신 자신의 모습"이라고 말한다. 오늘날의 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융의 '아니마'와 '자기(Self)' 개념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그리고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 부인이 등장한다. 에바는 싱클레어가 꿈에서 본 그 여인과 닮아있고, 신비로운 지혜를 가진 인물이다. 현대적 시각으로 보면 '멘토' 혹은 '영적 안내자' 같은 역할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싱클레어와 데미안은 각자 군대에 입대한다.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마지막으로 만난다. 죽어가는 데미안은 "언제든 네가 필요할 때 네 안에서 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데미안이 실제 인물이라기보다 싱클레어 내면의 목소리, 그의 '높은 자아'를 상징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결국 '데미안'은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에 관한 이야기다. "새가 알을 깨고 나오듯", 우리는 기존의 가치관이라는 '알'을 깨야만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리고 그 고통스러운 과정은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중학교에 막 입학했을무렵. 아이는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한다며 매일 밤 눈물을 삼키기도 했다. 학교 앞에 마중 나갔을 때 늘 혼자 걸어 나오는 아이의 뒷모습이 마음을 아프게 했었고, "친구들이 왜 나만 피하는지 모르겠어요." 라고 말하는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몰라 대신 안아주기만 했다. 그날 밤, '데미안'을 읽으며 문득 깨달았다. 아이도 지금 자신만의 '알'을 깨는 과정에 있다는 것을.
남편은 내가 아이를 너무 과보호한다고 말한다. 아마도 맞을 것이다. 내가 만들어준 안전한 세계, 그 달걀 껍데기를 아이 스스로 깨고 나와야 한다. 그 과정이 얼마나 아픈지 알기에 차마 말리지 못하고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게 부모의 슬픔이 아닐까.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아이를 낳고 경력단절 후 어렵게 들어간 회사. 그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시작한 지 일 년. 친구들은 내가 미쳤다고 했다. "안정적인 직장을 왜 그만두냐고, 이 나이에 새로운 걸 배우는 게 가능하겠냐고."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미 너무 익숙해진 그 안전한 '알'이 오히려 내 영혼을 가두고 있다는 것을. 낯선 분야에 적응하느라 매일이 고통스럽지만, 새로운 나를 발견해가는 기쁨도 있다. 새는 알을 깨야만 하늘을 날 수 있으니까.
'데미안'은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혹한 폐허 속에서 출간됐다. 헤세는 전쟁의 광기 속에서도 인간의 영혼이 성장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소설에서 싱클레어가 말한다. "매 순간이 새로운 시작이다." 백 년이 지난 지금도 이 소설이 읽히는 이유는, 아마도 우리 모두가 여전히 내면의 목소리를 찾아 방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 학기를 힘겹게 보내고 여름 방학을 앞 두었을 때,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와 처음으로 웃으며 말했다. "엄마, 오늘 체육시간에 선생님이 다람쥐 같이 동작이 빠르다고 칭찬해주셨어. 그리고 옆자리 친구가 집에 같이 가자고도 해서 요 앞까지 같이 걸어왔어." 눈물이 날 것 같았었다. 내 아이가 조금씩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에. 힘들었던 나의 청소년기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결국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알을 깨고 나와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요즘은 베란다 텃밭을 가꾸며 깨닫는다. 씨앗은 단단한 껍질을 스스로 깨고 나와야만 싹을 틔울 수 있다는 것을. 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과정이다. 때론 흙을 파헤치고 물을 주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다. 마치 부모가 자식에게, 친구가, 스승이 제자에게 할 수 있는 일처럼.
새로운 일에 적응해 나가기 시작한 나, 학교생활에 적응하려 애쓰는 아이, 그리고 갱년기를 겪고 있는 남편까지. 우리 가족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알'을 깨는 중이다. 그 과정이 아프고 혼란스럽더라도, 결국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날개를 펼치게 될 것이다.
저녁 시간, 가족들이 모여 앉아 하루를 나눌 때면 나는 슬쩍 꺼내곤 한다. "오늘 너희들의 알은 얼마나 깨졌니?" 처음엔 의아해하던 가족들도 이제는 안다. 그것이 우리가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것을. 그리고 그 깨어짐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것이 가족의 의미라는 것을.
작은 텃밭의 새싹들처럼, 우리도 결국 자신만의 방향을 찾아 자라게 되어 있다. 알을 깨고 나오는 과정이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운명이다. 그리고 그 깨어짐을 통해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자아를 만나게 된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내가 오십을 목전에 두고 다시 읽은 '데미안'에서 발견한, 내 삶을 새롭게 바라보게 해준 한 문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