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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민재 Dec 27. 2019

나는 어렸고, 크리스마스는 우울했다

어느 12월 25일에

냉장고엔 '쿠크다스' 두 상자가 있었다.
주황의 냉장고 조명 아래 쿠크다스는 너무도 초라했다.


산타 할아버지가 진짜 있는지 없는지 친구들과 설전을 벌이던 시절. 아주 어렴풋이, 부모님이 산타라는 걸 알지만 믿고 싶은 않았던 그런 나이쯤이었던 것 같다.


그날은 12월 25일 아침이었다. 들뜬 마음으로 잠에서 깼다. 머리 맡을 두리번거렸다. 아무것도 없었다. 좁다란 거실을 둘러봤다.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혹시나 하고 연 냉장고, 거기엔 '쿠크다스' 두 상자가 놓여 있었다.


엄마를 깨웠다. 산타가 다녀갔냐고. 엄마는 산타가 쿠크다스를 두고 갔다고 했다. 그것도 냉장고에. 심지어 두 상자 중 하나는 동생의 것이 확실했다. 나는 (무려!) 형인데 동생과 완벽하게 동일한 선물을 받은 것이다. 쿠크다스도 냉장고도 형-동생 평등주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냉장고 속 선물은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크리스마스는 내게 특별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집 안에 (겨우 내내 철수되지 않는) 작은 트리도 있었고, 부모님은 크리스마스 분위기 조성을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하셨다. 하지만 정작 크리스마스 당일은 평범했다. 선물은 화려하지 못했다. 어린 민재는 만족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산타를 원망했다. 커서 그 원망은 부모님에 대한 원망이 되었다. 나는 어렸고, 크리스마스는 우울했다.


더 크고 나서야 특별한 날이 항상 화려할 순 없단 걸 알았다. 특별한 날이 모두 특별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텔레비전 속 크리스마스와 나의 크리스마스를 비교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꾸며지고 연출된 모습이다. 그것을 연출하는 사람들의 크리스마스는 실상 평범할지 모른다.


크리스마스는 꼭 화려해야 할까? 금요일은 항상 불금이어야 할까? 화려한 것만이 좋은 것일까? 이런 날엔 으레 먹고 마시고, 음악과 웃음이 넘쳐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으레' 하는 것들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보자. 이런 프레임은 누가 만든 건지, 이 프레임을 통해 이익을 얻는 사람은 누구인지.


물론 나도 불금이 좋다. 매주 금요일이면 하던 일 다 접어두고 치킨 한 마리 뜯으러 가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그러고 보니 금요일인 오늘 저녁도 치킨이었다…) 하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다. 평범한 크리스마스, 차분한 금요일도 모두 소중한 날들이다.


화려하고 특별한 날이 있다는 건,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은 날이 있다는 것이다. 특별한 날만 특별하게 여기면 보통의 날들은 존재의 의미가 희미해진다. 알다시피 우리 모두는 특별한 날보다 보통의 날을 더 자주 만난다. 보통날의 가치에 대해 알아야, 일상 속에서 행복을 찾아야 진짜 행복한 사람이 되는지도 모른다.


혹시. 특별한 날은 없다고, 오히려 매일이 특별할 수 있다고 알려주려던 건 아닐까. 그날의 산타가. 그날의 엄마 아빠가 말이다.




*글을 쓰며 내 분수에 맞게 사는 법, 너무 무리하지 않고 사는 법, 일상의 작은 기쁨을 만드는 법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매일이 특별하다는 걸 아는 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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