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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민재 Jan 18. 2020

다시 천천히 걸어보았다

걷는 이야기 2

천천히 걷는 것도 쉽지 않단 것을 깨달았다. 습관의 무서움인지, 여유의 상실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다시 천천히 걸어보았다. 주말에 아내와 동네 주변을 산책했다.


겨울이라 옷을 단단히 입고 밖으로 향했다. 역시 주말 햇살은 출근길 햇살보다 좋았다. 걷기를 시작했다. 아내의 발걸음에 맞추어 천천히 걸어보리라 다짐했다. 그런데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발걸음이 자꾸만 빨라졌다.


빨리 걷다 느리게 걷다를 반복했다. 이 쉬운 것도 못하나 싶어 웃음이 나왔다. 나를 보다 못한 아내가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었다.


아내가 '서울에서 일주일 살기'를 했을 때의 이야기다. 여행은 아니었고, 서울의 어느 숙소 부근에 꼭 머물러야 하는 상황이어서 근처를 천천히 걸었단다. 그런데 자기만 천천히 걷더란다. 다들 빠르게 걸어서 자신만 뒤쳐지는 느낌이 들었단다.


서울 사람들은 나의 아내를 이상하게 생각했을까? 인도(人道)에 걸리적거리는 장애물 정도로 보았을까? 어쩌면 그들은 내 아내를 뒤로 하고 걸으며 묘한 희열을 느꼈을지 모른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빨리 걸어 몸에 열을 내고 칼로리를 소모하고 싶었다. 짧은 시간에 효율적인 운동을 했다는 성취감을 느끼고 싶었다. 뭔가 성과를 내고 싶다는 강박! 나는 스스로를 압박하고 있었다. 나는 서울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


억지로 천천히 걸었다. 이번엔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다시 어깨에 힘을 빼니 걸음이 빨라지고, 천천히 걸으니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안 되겠다 싶어 뒤로 걸었다. 그제야 아내의 걸음과 속도가 맞추어졌다.


각박한 세상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내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세상이나 남을 탓할 생각은 없다. 어쩌면 이것은 나의 문제다. 누구보다 여유롭고 행복하고 싶어서 열심히 살았는데, 내 옆에는 '열심'만 남아있는 느낌이다.


어쩌면 '누구보다'가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남보다 많고 적음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가 진짜 원하는 나의 모습은 무엇인지, 스스로를 조금 더 돌아봐야겠다.


나의 느리게 걷기, 두번째도 실패였다.




|커버 사진|

Pixabay

MabelAm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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