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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민재 Mar 08. 2020

화무십일홍

천천히 피는 꽃이고 싶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열흘 붉은 꽃 없다. 세월의 무상함이나 권력의 유한함을 비유할 때 쓰이는 말이다. 권력도 젊음도 끝이 있기 마련이다. 쉽게 말해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단 거다.


어디선가 이 말을 접하고 메모장에 기록해두었다. 가끔 메모를 뒤적이다 화무십일홍을 만날 때면, 머리가 하얘진다. 정신이 멍해진다. 시들어가는 붉은 꽃과 나만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느낌이 든다.


꽃에 '내가 가진 것'을 대입해본다. 지금 가진 게 영원할 수 없다면? 가진 것을 아낌없이 소진해야 할까, 아니면 가진 것에 감사하며 살아야 할까. 꽃에 '내 꿈'을 대입해본다. 내 꿈과 성취가 이내 스러질 것들이라면? 더 나아가길 멈춰야 하는 건 아닐까. 어차피 져버린다면 붉은 꽃이 될 필요는 무엇인가.


열심히 살던 20대 후반에 만난 화무십일홍. 이 다섯 글자는 내게 작은 충격을 주었다. 한창이던 나를 멈추게 했고, 한동안 나는 무기력했다. 화려함을 좇아 살던 나였기에.




영원할 것만 같던 20대가 지나고 30대가 되었다. 화무십일홍의 여진은 여전하다. 열심히 살아 뭐해, 라는 생각이 불쑥 들기도 한다. 다 부질없다며 잠수를 타기도 한다.


가끔 다른 꽃들이 지는 것을 목격하며 살아왔다. 정말 신기한 사실은, 빨리 피는 꽃이 빨리 진다는 것이다. 순식간에 유명해진 연예인은 그만큼 빠르게 잊힌다. 쉽게 번 돈은 쉽게 써 버린다. 번쩍하는 빛은 소리 없이 사라진다. 빨리 오르면 빨리 내려오는 것. 이것이 삶의 작은 진리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반짝 스타와 로또 1등이 부럽지 않다. (사실 조금은 부럽다.) 로또 1등 당첨 후 오히려 인생이 망가지는 경우도 많다. 차라리 무명배우로 살아가는 게, 가끔 로또 5등이나 맞는 게 내게 맞는 방식이 아닐까 싶다.


천천히 피는 꽃이고 싶다. 나중에 슬퍼지지 않도록. 붉지 않더라도 긴 시간 동안 꽃이고 싶다. 그렇게, 나는 가늘고 길게 살아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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