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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

by 정은하 Feb 16. 2025


향기에 민감한 사람들이 있다.

그중에 한 명이 나다.


나는 향에 민감하고, 향을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내 방 책상엔 다양한 향기들이 다양한 그릇에 담겨있다.

그 개수만 세어봐도 족히 10개는 넘을 것이다. 10개가 넘는 다양한 향기들은 다 제각각의 향기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 향기들은 나에겐 하루의 기분을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이 되곤 한다.


기분이 좋다, 싫다 이분법적으로 나뉘는 그런 기분 말고, 산뜻한 기분을 내고 싶은 날에는 가벼운 장미향을, 조금 기분이 다운되어 있는 날에는 무거운 우디향을, 구름이 적당히 있는 맑은 날에는 산뜻한 화이트 머스크 향과 같이 나에게 향수는 하루의 기분을 나타내는 수단이자 그 하루를 기억하게 해주는 수단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향으로 기억들을 추억하며, 향으로 사람을 기억하고, 상황을 기억한다.


처음으로 영국으로 여행을 갔을 때 공항에서부터 영국 길거리에서 나던 향기들을 잊지 못하고, 첫사랑이 뿌리던 향수의 시원 쌉쌀했던 향기를 아직도 기억하며, 친구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 맡았던 음식점 인센스의 달콤한 바닐라 향기를 잊지 못한다.


모든 사람들과 상황을 향기로 기억하다 보니,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향기로 추억되고 싶어 그날그날의 향수를 신중하게 고르기도 한다.


이제야 생각해 보건대 내가 우울함에 깊이 빠져있었을 때는 향기에 무감각했던 것 같다.

향기뿐만 아니라 모든 일상과 존재에 대해 무감각해 있었기 때문에 향기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던 것 일수 있지만 그땐 그랬다.

그래서인지 지금에서야 우울의 향기를 생각해 보면, 글쎄, 비 온 뒤 물기에 젖은 나무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상쾌할 것 같지만, 마냥 상쾌하지만도 않고 무게감 있게 나를 짓누르면서 비가 내리는 그런 향기.

그런 향수인 것 같다.


최근에 취미로 조향수업에 참여한 적이 있다.

여러 향기 중 자신이 조합할 향을 표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나는 3개의 향 선택에서 모두 꽃향기, 과일향기와 같이 밝고 싱그러운 향을 선택했다.

싱그러운 향과 반대로 비가 오고, 물기에 젖고, 나무들이 우거진 향은 나를 너무 무겁게 만들고 나를 짓누르게 만들었다. 근데 과연 그 향을 원래부터 싫어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 향들을 우울의 향이라 생각해서 무의식적으로 피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내가 원하는 밝고 싱그러운 향기로 향수를 만들었다.


이 또한, 나의 내면의 모습보다 외면의 모습을 향기로 만든 것이었을까?


글쎄, 그것까진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는 우울의 향기를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마음 그릇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알았다.

우울의 향을 맡으면 밤새 울부짖는 내가 생각나서, 제발 그만해 달라며 빌며 가슴을 내리치던 그때의 내가 생각나서, 그때로 돌아가는 것 같아서, 그래서, 그때가 싫어서 싱그러운 향을 선택한 것일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언젠가는 우울의 향도 받아들일 수 있는 나로 성장하여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향들을 사랑할 수 있고 기억할 수 있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배움이 있다고 하질 않는가, 나의 아픔도 언젠가 배움으로 다가올 날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언젠가는 이 아픔도, 이 우울도 온전히 받아드려 나의 배움의 뿌리로, 성장의 밑거름으로 쓸 수 있을 날이 올 것이라 믿고 싶다.


어떤 일에 전문가는 모든 일에 전문인 것과 같이, 나도 향기에 있어서는 비록, 아프고 슬픈 향기일지라도 맘에 품을 수 있는 그런 향기의 전문가가 되고 싶다.


사람을 기억하고, 상황을 추억하는데 좋은 기억만 가지고 갈 수 없듯이, 아픈 기억도 온전히 향기로 기억할 수 있는 날까지 앞으로 모든 날들의 향들을 사랑하고 마음에 담아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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