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

사랑의 양념 듬뿍, 김장 김치

by 반디

어릴 적 김장하는 날에 대한 추억은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다.

그저 홀로 김장 김치를 담그시던 친정어머니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새 모이 받아먹듯 날름날름 받아먹었던 기억밖에. 입술이 따끔거릴 때까지 받아먹다 뒤늦은 짠기에 물을 벌컥벌컥 마셨던 기억도.

손맛, 특히 김치 맛이 일품이셨던 친정어머니표 김치 맛에 길들여져 다른 집 김장 김치라도 얻어와 밥상 위에 올라온 날이면 장금이처럼 대번에 알아보고 젓가락도 대지 않았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음식 타박을 자주 하시던 아버지의 까다로운 입맛을 맞추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손맛에 더해진 탓이리라.

어느덧 여든다섯이 되신 어머니는 사고로 제대로 거동도 못하시면서도 아직도 가끔씩 깍두기, 겉절이, 물김치 등을 담가 막내딸에게만 특별 하사하신다. 옛사람이 되어 손수레도 쓰지 않으시고 장에서부터 그 무거운 김치며 무를 날라다가 잘 삭힌 김치를 내어 주신다. 어디 김치뿐이랴. 최근 들어 참기름을 사 본 적이 없다. 어떻게 아시는지 친정 집 앞 골목에 위치한 참기름집에서 참기름이 떨어질만하면 여유 있게 공수해 주신다. 무거운 짐이라도 들고 오시다 몸이 더 축나실까 만류해도 괜찮다며 손사래를 저으신다.

김치를 받아 온 날이면 다음날 꼭 안부 전화를 겸해 김치맛이 어떤지 물어 오신다. 미각을 제대로 느끼실 수 없는 연세시니 혹시라도 짜지는 않은지 염려하신 게다. 유독 외할머니 물김치를 좋아하는 둘째 녀석의 얘기를 전하며 맛을 검증해 드리면 그제야 안심하시고 전화를 끊으시는 어머니.

대부분의 부모님이 그러시듯 여러 자식들 중에서도 막내가 늘 짠하신 모양이다. 이제는 나 역시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지만 자식에 대한 사랑은 친정어머니 손톱만큼도 따라갈 수가 없다. 모진 세월을 이겨내신 연륜과 맷집을 어찌 감히 따라잡겠는가. 내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해 어머니보다 더 끙끙거리며 엄살 아닌 엄살을 피워대는 자신이 새삼 부끄러워진다.

결혼 후에는 연로하신 친정어머니 대신 고맙게도 시어머니께서 그 자리를 대신해 주셨다. 김장하는 날 내려가면 며느리 고생시키실까 엄동설한에 홀로 이미 김장을 다 하시고 양념이 두껍게 발린 시원한 김장김치를 흔쾌히 내어 주셨다. 손수 키워주신 손주 사랑이 각별하신지라 차에 실을 자리가 없다고 말씀드려도 차가 내려앉을 정도로 이것저것 싸 주셨다. 경제적으로 궁핍할 때는 재료값도 제대로 드리지 못했는데도 그것마저 한창 크는 애들 맛있는 거 사 먹이라며 도로 주머니에 찔러 넣어주시고는 하셨다.

예전에는 몰랐다.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의 김장 김치가 단순한 김치가 아니었다는 것을. 김장 양념처럼 온갖 몸에 좋은 재료들이 혼합되어 여러 감칠맛을 내듯, 자식들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버무려져 진한 사랑의 붉은색을 낸다는 것을. 김치가 부모님의 온정으로 삭아간다는 것을.

어느덧 두 어머니도 세월을 더 이상 이겨내지 못하시고 두 손을 드셨다. 편히 얻어먹던 매콤 시원한 김장 김치를 더 이상 얻어먹기 힘들게 되어 체면은 없지만 아쉬웠다. 이때부터 큰언니가 총대를 메고 5년 전부터 가족들이 총 출동하여 날을 잡아 김장을 하고 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조카까지 동원되어 말 그대로 김장 전쟁을 한바탕 치렀다.

친정어머니는 총괄, 장정들은 절인 배추 나르기, 올케 언니를 비롯한 여자들은 배추 치대기. 배추도 직접 저려서 하는지라 저리는데만 하루 웬종일이요, 씻은 배추의 물을 빼는데만 반나절 이상이 걸렸다. 자정쯤 되어서야 절인 배추를 씻어내느라 오빠와 올케언니 옷은 물에 젖은 지 오래다.

오전 중에 김장을 끝내려는 비장한 각오로 새벽부터 비닐 김장 매트를 펼치고, 고무장갑 낀 손을 두둑거리며 다들 열의를 다졌다. 올해는 감질맛을 더 내기 위해 젓갈의 종류도 멸치젓, 어리굴젓을 비롯한 4가지 젓갈을 섞었단다. 어디 젓갈뿐이겠는가. 사과, 홍시, 무, 갓, 당근 등 수많은 자연 산물들이 양념과 함께 버무려졌다. 맛이 없을 수가 없다.

사령관인 친정어머니의 진두지휘아래 둥근 매트에 쪼롬히 둘러앉아 치대기 시작했다. 중앙에 양념을 연신 부어가며 속잎이 노랗고 아삭한 배춧잎 사이사이로 골고루 붉은 옷을 입혔다. 처음에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시간이 지날수록 말수가 줄어들며 허리 한번 펴지 못한 탓에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터져 나왔다. 장시간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던 탓에 장딴지에 쥐가 나 핑계 삼아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

시작 전에는 수북이 쌓인 양념이 넉넉하다 싶어 인심 쓰듯 팍팍 묻혔더니 끝으로 갈수록 이번에는 양념이 모자랄 지경이 되었다. 전술 실패였다. 어쩔 수 없이 끝다리 배추는 겨우 때깔만 입히고 남은 배추는 물김치를 담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김장이 드디어 마무리되고 주변을 살펴보니 그야말로 난리통이 따로 없다. 옷이며, 얼굴이며, 바닥이며 마치 전투의 흔적처럼 온통 붉은빛이었다. 중력의 힘이 엉덩이를 붙잡아 엉거주춤하게 일어섰다. 관절인형처럼 마디마디가 뚝뚝 끊어지는 것처럼 쑤셨다. 허기도 서서히 몰려들었다.

누구라 할 것 없이 일사불란하게 난장판을 수습했다. 그리고는 이어지는 달콤한 보상, 김장 김치와 영혼의 단짝인 수육과 생굴. 김치를 죽죽 찢어 수육에 돌돌 말아 한 입 먹었을 때의 행복감이란... 약간 삼삼하면서도 매콤한, 젓갈향 가득한 김치와 갓 삶아져 나온 수육의 담백한 육향이 입안에서 퍼지며 절묘한 맛의 조화를 이뤘다. 여기에 더해 생굴은 오늘따라 왜 그리 신선하던지. 정말이지 신이 내린 선물이 아닐 수 없다.

다들 주말까지 반납하며 1박 2일로 진행된 올해의 김장은 끝이 났다. 김치통속에 가득 담긴 김치들이 금보다 귀하게 여겨진다. 이런 김치가 한국인의 소울 푸드가 아니면 뭐겠는가. 우리에게 김치를 대신할 음식이 과연 있을까 싶다.

사랑의 양념이 듬뿍 발린 김치, 1년을 김치통속에서 발효되어 묵은지로 변신할 김치. 가족들의 사랑도 김치와 함께 서서히, 더욱 짙게 묵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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