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들이랑 점심 먹다가 이런 말을 들었다. 요즘 30대 중후반 들은 부동산, 아파트 얘기만 한단다.
이번 기회에 서울 아파트 상승에 못 올라타면 영영 기회가 없어질 거라는 것.
우리 사회에서 부동산은 늘 최고의 화제였지만, 최근엔 30대가 가장 뚜렷한 부동산 시장의 주역으로 나섰다고 한다. 웃으며 재밌는 농담을 하다가도 아파트 얘기만 나오면 침묵이 돈단다. 상대적 박탈감, 상실감, 분노 이런 감정이겠지..
그 얘기를 듣던 중 내 주변인들과 최근에 어떤 대화를 했는지 살펴보았다.
요사이 내가 만난 40대 후반~50대 초반들은 사실 부동산 얘기를 자주 하진 않는다. 이미 집이 있는 사람이 꽤 있기도 하지만 더 이상 아파트 투자는 관심 밖인 것 같다.
자녀 진학이나 취업 등의 얘기도 하지만, 체감상 가장 빈도가 높은 주제는 'After now', '노후준비'등이다.
노후대책일 수도 있고, 가족관계에 대한 고민일 수도 있고, 인생 이모작에 관한 불안감도 있다. 다들 웬만큼 살아온 것 같은데 또 이만큼의 시간이 앞으로 남아 있다는 것에 극심한 불안을 감지한다.
현재 직장에 다니고 있는 사람이라면 직장에서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 것이다. 다니는 직장이나 직업 자체가 불안정한 경우도 있다.
80세 작가 마리코 이야기를 담은 일본 만화
그래서 퇴사와 휴식과 이직을 몇 년 새 연달아 맞이한 나에게 많은 질문을 한다.
"다시 일하니 어때?"
"회사 관두니까 뭐가 제일 아쉬워?"
"그 나이에 새로 하는게 두렵지 않아?"
나는 사실 이런 어려운 물음에 대해 깊이있게 통찰하지는 않았다. 그저 나이 50이 되면 직장을 관두고 싶었던 열망이 이전부터 있었고, 또 마침 50이 되자마자 회사 문화가 급격히 변해 미련없이 떠날 결심을 할 수 있었다.
물론 관두고 나서는 후유증이 꽤 있었다. 결정은 덜컥했지만 회사의 울타리를 벗어나 백수가 되자 예기치 못했던 불편함, 불안감이 물밀듯 다가왔다.
그래서 위 질문에 대한 내 답변은 퇴사를 결정할 때는 그렇게 두렵지 않았지만, 꼭 퇴사 이후를 준비하고 관두라고 말하고 싶다. 준비 기간이 길어지면 퇴사는 절대 못하지 않느냐는 반문이 다시 돌아오긴 한다. 그래도 퇴사 이후의 생활, 특히 경제적인 일상생활을 시뮬레이션 해보길 권한다.
20,30대와 달리 50대가 돼서 다른 직장을 정해놓지 않고 회사를 나오면 처음 몇일은 백년묵은 피로가 가시는듯 하다. 느긋한 아침, 평일에 여유를 부리는 즐거움, 취미생활의 발견 등으로 행복감에 벅차 오른다.
그러나 수십년간 월급의 굴레에 살아온 몸과 마음은 25일(내 월급날)이 다가오면 급속하게 움츠러든다.
어떤 일들이 있더라도 매달 정해진 날짜에 내 통장에 가용할 현금이 들어온다는 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은혜다. 열심히 일한 달도 있고, 대충 일한 달도 있다. 그러나 월급은 한결같다.
월급이 사라진 25일을 몇번 겪고 나면, '텅장'이라는 신세 한탄하는 소리도 부러워진다. 그러니 월급의 상실이 얼마나 큰지 알고 거기에 대비해야 한다고 꼭 당부하고 싶다. 그걸 감당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또 당장 현실적으로 아쉬운 회사 내 은근한 서비스들도 있다. 컴퓨터 .팩스 등 사내 기기들, 건강검진, 복지포인트, 명절 선물 같은 것들이다. '그까짓 거' 하고 생각했지만, 막상 사라지면 서운하다. 그리고 탐난다.
나는 사람간 네트워크나 명함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덜했지만, 명함이 없다는 것에 충격받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특히 남성의 경우. 사람들 만날 때 왠지 초라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지인에게 부탁해 명함이라도 하나 만들어달라고 부탁하는 사람을 여럿 봤다.
퇴사를 거쳐 재취업을 했더니 또 다양한 질문들이 쏟아졌다. 다시 일하니 몸이 따라가더냐고 한다면, 그저 감사해서 아직은 신체적으로 어려움을 감지하지 못한다. 나이 든 여성을 좋은 자리에 채용해줘서 온 우주에 감사하다고 매번 기도한다. 그리고 상대방이 먼저 내 체력을 걱정할까봐 홍삼과 각종 영양제를 먹어가며 열심히 적응하려고 한다.
다시 일하면서 조금은 여유로워졌다. 열심히 일하되, 조급하게 성과 내려하기보다는 탄탄하고 천천히 가고 싶다. 타인에게도 너그러워졌다. 기분 상하는 일이 있어도 그 감정에 너무 빠지기보다는 시간이 지난 뒤 다시 생각해보려 한다. 그럼 시간이 해결해주더라.
반면 모든걸 한번에 가질 수 없듯이 때대로 백수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 일하면 놀고 싶고, 놀면 일하고 싶은 간사한 마음 그대로다.
막상 재취업하니 백수 때 시작한 운동을 계속 이어나가지 못하는게 아쉽다. 조금 더 높은 수준까지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혼자 시간을 마음껏 계획하고 사용한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 같은 일인지도 새삼 깨닫는다.
손에 가지고 있는 것을 놓았을 때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 수 있다. 그렇다고 마냥 움켜쥐고 있을 수 있을까.
그 소중함을 재확인하면 내 삶에 소중한 일들을 다시 재배치하는 게 맞지 않을까.
가령 쳇바퀴도는 직장인으로 정신없이 지내는 현실에서 이전의 달콤했던 휴지기간을 그리워만 하기보다 병행할 방법을 찾는 것이다. 주말중 하루는 온전히 내 시간으로 갖는다든지 하는 방법으로 말이다.
나는 이 생각 저 생각에 빠지다가 가지치기를 하다 보니 운동을 좀 더 알차게 지속적으로 하고 싶은 것, 취미를 늘려 보는 것. 혼자 명상시간을 가지는 것 등을 내 지금 삶에 추가하고 싶다.
그건 꼭 직장을 다니지 않아야만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일을 하면서 짬짬이 끼워 넣으면 아예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24시간 일에만 신경 쓴다고 일이 잘되는 것도 아니다. 일에 올인하는 것만큼이나 내 가슴속에서 갈망하는 것들을 조금씩 충족시켜보자. 그래서 저녁시간에 운동도 시도해보고, 새벽에 명상도 해보고, 좀 더 안정되면 배우고 싶었던 것도 해보려 한다.
시간은 매일 사라지고, 우리 모두는 조금씩 늙어가고 있다. 노후는 어느 정해진 시점이 아니다. 노후대책이라는 것도 사실 뾰족한 건 없다. 그 시기를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월수입 액수나 작은 일거리를 확보하는게 내 노후의 확실한 대책이라고 말할 수 없다.
아쉬운 것, 하고 싶은 것을 추려내고 지금 할 수 있는 일들을 하자.
불안에 휩싸이면 발을 떼기가 쉽지 않다. 늙는다는 게 그렇게 불안하고 소외되는 것만은 아니다. 늙으면서 이런저런 의무와 강박을 벗고, 이제는 나 하나만 생각해도 되는 가벼움도 있다.
내일 당장 세상을 떠나도 후회없을 정도로 매일 버리고, 매일 가지치며...
요즘 가장 즐겨보는 유튜브 '밀라논나'. 많은 여성들이 닮고 싶어 하는 60대 여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