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 새로 배울 때 전문가에게 듣는 말이 '힘을 빼라'다. 특히 몸으로 하는 경우에 초심자는 긴장으로 온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어 동작을 배우기 힘들다. 운동도, 악기 연주도..
처음 배우는 사람 입장에선 그 말을 이해하기 어렵다. 수영할 때 몸에 힘을 다 빼고 해파리처럼 흐느적흐느적 움직이라면서 코어에는 힘을 주라고 하고, 발차기도 좀 세게 하라고 하고. 그게 가능한 일인가.
초등학생 시절 피아노 배울 때도 그랬다. 피아노 선생님은 내 손가락, 어깨에 힘이 많이 들어갔다며 볼펜으로 새끼손가락을 때리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도 속으로 '힘 빼는 기술도 가르쳐주지 않으면서 왜 때리냐'라고 억울해했다.
글렌 굴드의 피아노연주. 이렇게 부드럽게 힘빼고 연주할 수 있을까
수영을 배운 지 1년이 훌쩍 지나 영법은 어느 정도 익혔지만 여전히 동작이 부드럽지는 않다. 여름에 바다수영이 목표인데 얼마나 멀리 갈 수 있을지 불안하다.
혼자 수영장 가서 소위 '뺑뺑이'를 돌면서도 25미터 레인 왕복 6바퀴 정도 돌면 숨이 답답해서 쉬었다가 다시 하는 편이다.
그러던 내게 혁명적 변화가 나타났다.
여느 때처럼 유튜브를 이리저리 보다가 '몸에 힘 빼는 팁, 앞으로 가지 말라고?'를 접했다. 수영은 물살을 가르며 나가려고 하는 건데 무슨 말이지? 의아했다.
이 수영 유튜버는 초보자의 경우 앞으로 나가려는 욕심에 팔, 다리에 힘을 줘서 오히려 더 나아가지 못한다고 조언했다.
그래서 더 빨리 나가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피트니스센터의 트레드밀에서 달리듯 제자리에서 본인 자세만 집중해서 수영을 해보라고 권했다.
제자리 수영, 내 자세만 집중, 빨리 나가려는 욕심 버리기
dannyschool님의 영상
일단 늦은 저녁 시간에 수영장을 찾았다. 아무래도 사람이 붐비지 않아야 편하게 천천히 수영할 수 있어서다.
'나는 제자리 수영만 한다. 팔 동작 제대로 하고, 중심 잡고 머리 똑바로 하고' 이것만 되뇌며 수영을 했는데 순식간에 10바퀴를 돌았다. 발차기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냥 둥둥 떠다니듯이. 팔로 물살만 뒤로 내보내니 슉슉 물속을 지나갔다.
이렇게 편할 수가. 방금 내가 수영을 한 건지, 산책을 한 건지 모를 정도로 고된 느낌이 없다. 가장 좋았던 건 호흡이 너무 편했다. 기분 좋게 산책할 때 어느 누구도 호흡에 신경 쓰지 않듯이 그런 평온함을 경험했다.
이후 몇 번 이 방법을 써먹었고, 기쁨의 수치는 계속 올라갔다.
제자리 멈추듯 뺑뺑이 수영을 하고 샤워를 마친 뒤 집으로 돌아오면서 가슴에 행복감이 스멀스멀 퍼져나갔다.
힘 빼고 부드럽게 수영을 한 성과도 좋았지만, 인생을 대하는 내 자세에도 편안함이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회사를 그만둔 뒤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특히 나는 50년간 계획표, 'to do list' 중독자였다. 뭐든 계획하고 시간을 쪼개 쓰고 , 하루라는 단위는 앞으로 나가는 과정의 일부라고만 여겼다. 앞이라는 것은 내가 세운 목표, 미래의 미션. 그것이 없으면 불안하다. 내가 서있는 자리, 현재라는 시간은 눈에 들어오지가 않았다.
회사 다닐 때는 어영부영 하루가 가기도 하고, 회사의 스케줄에 나를 맡겼다면 혼자 있으니 내 모든 시간을 내가 감독해야 할 것 같다는 통제 의식에 사로잡혔다. 앞서 가겠다는 무리한 욕심의 발로다.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일을 천천히 생각하고 매일, 매시간 집중하고 몰두하다 보면 어느새 미래의 한 지점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특정 목표에 핀을 딱 박아놓고 그것만 생각하며 하루를 보내기보다는 인생의 흐름 속에 나를 자연스레 올려놓고 현재에 집중하기.
복잡했던 머리도 맑아지고 경직됐던 입가도 풀어지는 것 같다.
온몸에 힘을 빼고 물에 떠다니는 즐거움을 만끽했듯이, 움켜쥔 주먹을 풀면 인생의 풍요를 얻을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