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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ng Juha Nov 08. 2020

서른이 넘어도 익숙해지지 않던 (5)

첫 소설을 쓰며 다시 쓴 상실의 기억

처음으로 신촌에 위치한 문화센터에서 소설 창작 수업을 듣기 시작한 건 2013년 12월이었다. 그 무렵의 나는 어떻게 소설을 쓸 생각을 했던 걸까.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내가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든 정황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한 가지 어렴풋이 기억나는 사실은, 소설 수업을 신청하기 2년 전 어느 노트에 '소설을 쓰고 싶다'라고 적었으며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그 사실을 알게 되어 놀랐던 일이다. 무의식 중에 나는 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을 뿐인데 진짜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이후 무려 5년여 동안 습작을 하게 된다.

물론 첫 번째 습작을 할 때까지만 해도 내가 이후 무려 열 편 정도의 소설을 쓰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문제는 첫 번째 소설이었는데, 소설 창작 수업에서 진행한 합평-서로의 소설을 읽은 뒤 피드백을 주고받는 일-시간에 사람들이 너무나도 격찬을 해주었기에, 나는 그만 내가 소설을 잘 쓴다고 착각해버리고 계속 쓰게 된 것이다.

* 그간의 습작 목록. 나는 게으른 습작생이었기에 습작의 양이 많지 않다.

「마파」
「어느 유리코의 죽음」
「절연되지 않기를」
「수레에 실린 골판골판들」
「욕조」
「고독사」
「즉흥연극」
「대디스」
「어둑해지기 전」
「장미 없이는 무의미하다」
「하필의 여름」
「쓰나미 피아노」(미완성)


보통 국문과나 문예창작과 출신들은 중고등학생 시절에 문청, 그러니깐 문학청년 소리를 들을법한 양의 독서를 한다. 하지만 나는 2008년부터, 그러니깐 졸업 이후에서야 소설을 조금씩 읽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문학 독서와 관련해서는 내 인생에서 두 가지 장면이 가장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중 첫 번째 장면의 장소는 2008년 당시 상수역 인근에 위치했던 북카페 '토끼의 지혜'다. 나는 가끔 친구와 그곳에 놀러 가곤 했는데, 언제부턴가 혼자 서 책을 읽는 공간으로 즐겨 찾았다. 그곳에서 나는 아직 표절 시비가 있기 전이었던 신경숙의 신간 『엄마를 부탁해』를 집어 들어 읽기 시작했다. 그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눈물을 쏙 빼며 울었고,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운 뒤 깨달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오랫동안 엄마를 잃었다는 상실감에 서러웠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나였다. 엄마와 생이별하고 아빠에게 미움받으며 스스로를 고아라고, 차라리 고아였으면 나았겠다고 끝없이 생각했던 나였다. 사회에 나와 겪어본 적 없는 힘든 일을 겪을 때마다 엄마를 원망하는 동시에 그리워했다.   

하지만 『엄마를 부탁해』를 읽으며 나만 엄마를 잃어버린 게 아니라, 엄마도 나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처음 젖을 물렸던, 모든 첫 경험을 안겨주었던 딸을 잃어버렸음을 깨달은 것이다. 어딘가에, 비록 자신이 선택한 일의 결과였다 할지라도, 엄마가 나와 동일한 아픔과 상실감을 지닌 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커다란 위로를 받았다. '나'에 몰두하며 괴로워하는 삶에서 조금 벗어나 '엄마'의 아픔을 처음으로 알게 되고 공감하게 된 것이다.

이후 나는 첫 습작 소설을 쓰는 동안 소설 안에서 소설의 화자를 통해 엄마를 다시 만난다. 완성된 최종본에서는 결국 삭제했지만, 초고에는 이런 장면이 있었다. 내가 쓴 소설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엄마가 그 사실을 알게 되고 엄마로부터 연락이 와서 십오 년 만에 엄마를 만나게 되는 장면 말이다. 그 장면을 쓰면서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나는 교회에 다니는데 성서의 창세기에는 나처럼 오랜 기간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만 했던 인물이 나온다. 바로 요셉인데, 그는 형제들에 의해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가 약 13년 동안 부모를 보지 못하고 살아야만 했다. 그런 요셉이 자신의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얼마나 크게 울었는지를 성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창 45:2)

엄마를 다시 만나는 장면을 쓰는 동안 집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정말이지 요셉처럼 큰 소리로 엉엉 울었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이후의 내 삶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준 값진 눈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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