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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중립국 Apr 22. 2021

오늘의 서술, #7 시선으로부터,

#7 시선으로부터,


  창작의 욕구와 자기 파괴의 욕구가 다른 이름을 가진 하나라는 것이 언제나 나를 슬프게 했습니다. 20세기는 끔찍한 세기였고, 끔찍한 걸 지나치게 많이 목도한 이들은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버리기도 했습니다. 한국이 다른 나라보다 자살률이 높다지요? 한국 예술가들의 자살률은 아마 그보다 더 높을 겁니다. 언니들, 친구들, 동생들… 거의 격년으로 한 사람씩을 잃었습니다. 예민해서 아름다운 사람들이었다는 건 압니다. 파들파들한 신경으로만 포착해낼 수 있는 진실들도 있겠지요. 단단하게 존재하는 세상을 향해 의문을 제기하는 모든 행위는 사실 자살과 닮았을 테고요. 그래도 너무 많이 잃었습니다.  

  다 포기하고 싶은 날들이 내게도 있습니다. 아무것에도 애착을 가질 수 없는 날들이. 그럴 때마다 생각합니다. 죽음으로, 죽음으로 향하는 내 안의 나선 경사로를 어떻게든 피하겠다고. 구부러진 스프링을 어떻게든 펴야겠다고. 스스로의 비틀린 부분을 수정하는 것, 그것이 좋은 예술가가 되는 길인지는 몰라도 살아 있는 예술가가 되는 일임은 분명합니다. 매혹적으로 보이는 비틀림일수록 그 곁에 어린 환상들을 걷어내십시오. 직선으로 느리게 걷는 것은 단조로워 보이지만 택해야 하는 어려운 길입니다.

 - XX예술대학 특별 초청 강연에서(1996) / 정세랑, 장편소설[시선으로부터] 중

 
 정세랑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공개되어 화제가 된 ‘보건교사 안은영’의 동명 소설 원작자이고, 요즘 밀레니얼 세대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기에 탐독하기로 했다. 집에 ‘시선으로부터’가 있길래 안은영을 읽기 전 워밍업으로 먼저 펼쳐보았다. 아직 40페이지 밖에 못 읽었지만, 재미있을 것 같다. 전통적인 가치와 새로운 가치가 대립하는 과도기에 자기 목소리를 냈던 한 인물(시선)과 그로부터 파생된 인물(자식)들이 현시대를 사는 이야기로 보인다. 책에서는 위 발췌에서와 같이 그가 남긴 말이나 글로 ‘시선’이라는 인물을 표현하고 있는데, 인상적인 내용이어서 가져왔다.


 발췌된 내용은 예술가의 멜랑콜리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다. 낭만적 우울이 창작의 원천이라는 말에 일견 동의하는 바이지만, 우울에 방점을 찍다 보면 자신까지 잃을 수 있다는 이야기. 이 우울을 지긋이 풀어내는 일이야말로 살아 있는 좋은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말로 보인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우울/멜랑콜리는 단순한 감정의 상태는 아니라고 본다. 병리적으로 약을 처방받거나 심리상담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닌 세계와 조우하면서 발생되는 어떤 마찰이라고 해야 하나. 창작은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일인데, 그 이유는 말 그대로 내가 원하는 것이 이 세계에 없어서이다. 없는 것에만 집중하다 보면 우울이 정말 절망이 되어 병원에 가야 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기도 하겠지만, 창작의 발판으로 삼아 있게 하기 위해 세심히 들여다보는 멜랑콜리의 마음가짐이 필요하다는 말.

 

 나는 비극을 좋아하는데 나한테도 적용되는 내용인 것 같다. 먼저 하나 얘기하자면, 창작과 수용은 예술경험이라는 큰 틀에서 맥을 같이 한다고 본다. 예술가가 작품을 만들면서 수행하게 되는 고찰로부터 동반하는 자기 형성(인경 형성)이 수용자의 예술경험보다 덜하지는 않을 거다. 어쨌거나 비극을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히 슬픔 감정에 빠져드는 게 좋아서가 아니라 기존 질서와 부딪혀 나온 예술가들의 멜랑콜리를 엿보기 위해서다. 새로운 세계를 위해서는 현재의 문제점(슬픔)이 무엇인지 잘 들여다보는 일이 먼저니까. 허나 너무 빠져들다 보면, 그리고 그 세계로 끝내 가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이나 우울이 지배하면 시선의 말처럼 무기력과 세계에 대한 애착을 상실할 수 있을 것이다. 직선으로 느리게 걷는 것은 단조로워 보이지만 어려운 길이다라는 말은 조급해하지 말고 뚜벅뚜벅 길을 만들어가라는 의미일 것이다.


 내가 죽기 전까지 내가 바라는 세계와 만나지는 못할 것이다. 이것은 비관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올 것이라는 낙관이 있다. 비관적 낙관이 날 살아있게 한다.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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