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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봄일춘 Apr 26. 2021

"선발"을 넘어 "교육"으로


 대학입시는 "선발"이라는 패러다임에 예속되어 긴 시간을 연명해오고 있다. 대입전형의 형태는 무수히 변해왔지만 사실 ‘많은 가운데서 골라 뽑는’ 방식의 다름 아니다. 결국 뽑히느냐, 뽑히지 못하느냐를 두고 웃고 우는 구조이다. 여기에 선발되었을 때의 성취감을 넘어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부를 일정 수준 이상으로 예견할 수 있다면 선발되기 위해 노력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실제로 상위권 대학에 진학하여 소위 출세한 인물들을 우리는 그동안 오랫동안 목도 目睹해왔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하지만 경우의 수를 따져봤을 때, 상위권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보다 나은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누릴 확률이 높은 건 사실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어떠한 형태로든 비교우위를 선점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수밖에 없다. 대학입시 준비 위주의 교육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학교 본래의 기능은 무엇일까? 학교는 학생에게 교육을 실시하는 곳이다. 다양한 아이들을 키워 내는 곳이다. 아이들이 다양한 능력을 키우고, 희망하는 것들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 그것이 학교 본래의 기능이 아닐까? 학교 본래의 기능에 비춰봤을 때, 작금의 교육 현장은, 교육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 대학입시에서 중등교육과 고등교육 간의 계통성은 연계되고 있는가? 어른들의 당연함과 고집스러움에 우리 아이들만 학원으로, 문제풀이로, 스펙 쌓기로 내몰리고 있는 건 아닌지? 정작 “꿈과 끼를 키우는 교육”이라는 캐치프레이즈는 헛바퀴를 돌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꿈과 끼”는 학생부종합전형(이하 학종)과의 만남을 통해 그 쓸모가 극대화되었다. 성장가능성, 잠재력이 학종 선발의 key이고 그 열쇠를 거머쥐기 위해 학생도, 학부모도, 학교도 “꿈과 끼”를 키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성장가능성을 객관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그 부산물을 학교생활기록부(이하 학생부)에 차곡차곡 쌓고 있다. 하지만 대학은, 입학사정관인 나는 3년간 자유롭게 “꿈과 끼”를 키우라고 해놓고 마지막에는 “선발”이라는 칼을 서슴없이 들이댄다. 잠재력을 특정 행위가 아닌 우등과 열등으로 분류하고, 평가하고, 선발한다. 결국 “꿈과 끼”는 애초의 기대와는 달리 또 다른 경쟁을 야기한다. 학종의 여러 순기능과 함께 역기능이 더 선명해지는 지점이다.   

  

 현재의 객관화된 활동과 성취, 다시 말해 소수점 몇 자리까지 수치화된 등수를 매겨 선발하는 방식에 대한 싫증과 일정 수준의 계급 편향성을 일거에 극복할 방도로 시작된 입학사정관제, 학종도 결국 또 다른 계급적 선발방식을 재생산해내고 있다. 교육도, 대입전형도 이러한 결과에 대해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선발”이라는 비교우위의 패러다임과 그 선발에 따른 사회적‧경제적 “부산물”에 대한 논의는 늘 뒷전이다. 여기에 더해 대입 학령인구 감소라는 큰 숙제가 우리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다.      


 신자본주의와 학력주의 가치관에서 파생된 사회적 이슈들에 대해 강 건너 불구경하던 태도에서 벗어나 이제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야 할 때가 아닐까? 기존처럼 “선발”의 틀을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할까? 9할 이상을 실패자로 만드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하는 걸까? 동유럽처럼 대학교육 없이도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할 수는 없을까? “선발”이 아니라 “다양한 능력을 키우고, 희망하는 것들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은 여전히 어불성설일까? 그들은 되는데 우리는 왜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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