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명순씨! 하고 싶은 거 다하고 살아요!”
젊은 시절, 꿈 많고 세상 밖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했다던 엄마. 그런 엄마는 세 남매를 위해 1년 365일 슈퍼마켓 문을 여셨다. 당시 슈퍼마켓에는 조그마한 방이 하나 딸려있었는데 부모님은 그 방에서 먹고 자고 생활하셨다. 슈퍼마켓은 우리 식구의 삶의 터전이었고, 엄마의 활동반경이었다.
자식들 다 시집 장가보낼 때까지 엄마는 슈퍼마켓에 자신의 청춘을 오롯이 쏟아부으셨다. 오랜 세월 그 한자리를 묵묵히 지켜내셨다는 존경과 함께 고단했을 엄마의 생(生)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그럼에도 엄마는 괜찮다고 오히려 내 삶을 위로해 주신다. 29평 그 작은 공간에서.
특발성 비특이성 간질성 폐렴. 엄마의 병명이다. 처음 들어보는 병명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희귀병이라고 했다. 지난 2003년부터 엄마는 이 질환을 앓고 계신다. 이 질환은 뚜렷한 원인이 없이 발병한다고 했다. 짐작컨대, 그 뚜렷한 원인은 자식이고, 엄마라는 무게이고, 세상이 29평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리. 처음 병명을 접하고 담당 의사와의 진료상담은 엄마의 병명을 아는 시간이 아닌, 엄마에 대해 무지했던 나를 마주하는 자리였다.
병명을 진단받고도 엄마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셨다. 평상시보다 숨이 조금 찰뿐 괜찮다고 하셨다. 그런 줄 알았다. 일을 조금 덜 하고, 좋은 공기 마시면 금방 괜찮아질 거라 믿었다. 그렇게 눙쳐 생각했다. 그 해, 병원에 장기 입원하시기 전까지.
그 이후 엄마는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고 계신다. 혼자서 하실 수 있는 리스트도 하나 둘 줄어들었다. 건강에 대한 걱정이 늘어나는 만큼, 내 잔소리의 강도도 점점 강해졌다.
“무리해서 집안일하지 마세요. 설거지는 아버지 보고 좀 하라고 하시고요.”
“약 제시간에 꼭 챙겨 드세요.”
“밥맛이 없더라도 건강 생각해서 좀 더 드세요.”
내 잔소리의 강도에 상관없이 엄마는 점점 쇠약해지셨다.
4년 전 진눈깨비가 오던 날, 여동생에게 걸려온 다급한 전화 한 통. “엄마가 다시 입원하셨어, 준중환자실에!” 휴대폰 너머로 메아리치는 여동생의 척척한 목소리가 전화를 끊고도 한동안 귓가에 윙윙거렸다.
다행히 남은 연차가 있어 며칠을 엄마 병간호를 했다. 병원에 있던 그 며칠 동안,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가 모르는 엄마가 더 많아졌음을 새삼 느꼈다. 약에 취해 계속 주무시기만 하는 엄마를 보며 엄마는 뭘 좋아하셨을까 생각했다. 곤히 잠든 엄마를 보며 혼잣말을 했다. ‘일도 좋고, 가족도 중요하지만 엄마 몸 좀 챙기세요. 애쓰면서 사느라 엄마 삶 제대로 못 챙기지 말고. 남은 삶은 엄마 원하는 거 하면서 그렇게 살아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전명순씨! 하고 싶은 거 다하고 살아요!’
한바탕 쏟아내니 조금은 홀가분하다. 아이러니하게도 병상에 누워 계시는데 아들 걱정만 하던 엄마가 오히려 편해 보였다.
그 이후로도 엄마는 1년에 2~3번은 입원하고 퇴원하신다. 자식들 시집 장가 다 보내고 나면 국내로, 해외로 마음껏 여행 다닐 거라고 입버릇처럼 얘기하셨는데. 이젠 산소호흡기 없이는 대문 밖으로 한발 떼기도 어렵다. 1층에서 2층으로 옮겨왔을 뿐, 29평이 여전히 엄마가 생활하고 있는 공간의 크기이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2층 창문 밖으로 비치는 풍경을 하릴없이 바라보는 게 엄마의 유일한 소일거리가 됐다.
“자주 올게요!” 본가에 들렀다 집에 돌아올 때면 어김없이 엄마에게 건네는 인사다. 하지만 인사의 진정성이 부족해서일까? 지척에 있음에도 자주 찾아뵙지 못한다. 학교 업무로, 육아로, 쏟아지는 관계 맺기와 역할로, 본가에 가는 날이 점점 줄어간다.
아침 출근길, 2분 남짓의 전화통화를 그래도 자식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위안으로 삼은 지 오래다. 그 구구한 위안도 잠시, 전화통화 끝에는 늘 죄송함이 부산물로 주어진다. 하루 24시간. 모두 같은 시간을 살아간다. 그런데 이상하다. 내 시계는 늘 바쁘고, 엄마 시계는 늘 빠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