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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봄일춘 Mar 09. 2022

책장이몽


어김없이 목요일이 돌아왔다. 오늘이 목요일이라는 자각과 함께 몸이 바짝 긴장한다. 오늘도 아내에게 걸리지 않고 무사히 집을 빠져나가야 한다. 침대에서 조심조심 일어나 아내의 동태를 살핀다. 예사롭게 아내는 아이들 아침식사를 챙기느라 분주하다. 아내는 아침 사과가 몸에 좋다는 설화에 기대어 사과를 세척하는 중이다. 아이들에게 껍질채 먹일 요량으로 사과 겉 표면을 흐르는 물에 박박 문질러 닦고 있다.


아침식사 준비로 분주한 아내의 시선을 피해 욕실로 향한다. 지금부터는 속전속결이다. 머리를 감고 말리다가 아내에게 들키면 큰일이다. 어제 미리 머리를 감고 잔 터라 머리에 물을 묻혀 간단히 정리만 하면 된다. 빠르게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다. 서류가방을 들고 방문을 나서자 거실에서 등교 준비를 하던 아들 녀석이 눈짓으로 ‘엄마는 부엌!’ 이라고 알려준다. 이제 마지막 관문만 남았다. 까치발로 중문을 열고 나가려는 찰나, 아내가 나를 부른다. 이럴 때 보면 아내는 등에도 눈이 달린 거 같다.

“여보~~~”

“......”

“여보, 알지?”

“응, 뭘?”

“오늘 목요일이잖아!”

“아, 오늘이 목요일이야? 벌써 그렇게 됐나? 목요일이 왜 이렇게 자주 오냐? ㅎㅎ”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아무튼 내가 무슨 말하려는지 알지?”

“그럼 알지. 그런데......”

“여보!!! 그 그런데가 벌써 몇 달째인 줄 알아?”

“......”

“오늘은 제발 부탁 좀 할게. 플리즈~~~!”

“알았어. 퇴근하고 와서 할게!”

“아니, 나가는 길에 조금이라도 가지고 나가면 안 될까?”

“오늘 아침부터 회의라, 퇴근하고 와서 할게!”

“정말이야? 이 꼭두새벽부터 회의를 한다고? 이상하게 매주 목요일 아침마다 회의를 하더라.”

“그러게 말이야. 여하튼 이따 퇴근하고 와서 정리할게. 나 간다!”

“오늘은 꼭 해야 돼! 부탁해!”

“......”

“알았지?”

“응!”


아이들 새 학기 시작 두 달 전부터 매주 목요일마다 아내와의 실랑이가 반복되고 있다. 지칠 법도 한데 아내는 그 어느 때보다 집요하다. 이번만큼은 양보를 할 수 없다는 기세다. 이에 질세라 나도 한 치의 양보도 할 수 없다. 아니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크다. 이런 우리 부부의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목요일은 너무 빨리 찾아온다.




매주 목요일은 우리 아파트 단지 분리수거를 하는 날이다. 여느 집들처럼 우리 집도 분리수거에 진심이다. 깨끗한 지구를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줘야 한다는 생각에 나도 아내도 한마음이다. 우리 부부는 무엇보다 플라스틱 재활용품에 신경을 많이 쓰며 분리배출을 하고 있다.


무색투명한 페트병과 음료수 페트병은 내용물을 깨끗이 비우고, 비닐 라벨을 제거한 뒤 압착한 후 뚜껑을 닫아 버린다. 투명 페트병에서 장섬유를 뽑아낼 수 있어 옷, 가방, 신발 등에 사용되는 다양한 형태의 섬유를 만들 수 있다는 말에 더 신경을 써서 배출한다. 일회용 컵, 트레이, 계란판, 과일 투명 포장용기 등은 일반 플라스틱류로 배출한다. 색이 입혀진 페트병이나 겉면에 글자가 인쇄된 투명 페트병은 분리배출 대상이 아니다 보니 가급적 구매하지 않는다.


플라스틱 재활용품 분리배출에 같은 마음으로 열과 성을 다하는 우리지만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에 대한 생각은 다르다. 나는 쓸모를 다해 처분을 기다리는 책이라 할지라도 배출도 나눔도 쉽지 않다. 반면 아내는 책장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헌책들을 정리하고 싶어 한다. 나는 무한 관대하고 아내는 박하다.


배출의 운명에 처해있는 책들은 나의 인간관계와 맞닿아있다. 송년인사와 새해인사를 할 때면 한동안 신상정보가 업데이트되지 않은 핸드폰 번호에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번호마다 사연이 있기 마련이다. 가끔 소식이 궁금한데도 연락 한 번 안 하고 지내는 A, 바쁘다는 핑계로 그리운 대로 흘려보내고 있는 S, 업무상 연락을 주고받던 P, 옛 직장동료 L, Y 등등. 인연을 쉽사리 삭제할 수 없다 보니 번호 정리도 쉽지 않다. 나이에 정비례하게 안 쓰는 핸드폰 번호가 쌓이고 쌓인다.


예사롭게 손에 쥐고 읽던 책들, 학부시절 몇 달을 동고동락했던 손때 묻은 연극대본-《짝사랑도화원暗戀桃花源》, 《붉은 하늘紅色的天空》, 학창 시절의 열심을 대변하는 전공서적-《고문관지古文觀止》, 《송사宋詞》, 《당시삼백수唐詩三百首》, 《원곡元曲》, 《노신전집魯迅全集》 등등, 대학원 논문을 쓰면서 자료로 활용하려고 베이징北京대학교의 도서관에서 몇 날 며칠을 직접 복사해서 만든 제본, 박물관에서 일하면서 중국 소수민족 혼례 조사를 위해 현지에서 어렵사리 구한 민속지民俗誌, 여기에 더해 어떤 이유로 사놓고 한 번도 펴보지 않은 책들로 집안 책장이 꽉 차도록 가득이다.


침대 머리맡에도 책이 한 무더기다.

“여보, 책장의 책도 책이지만 침대에 놓여있는 이 책들 좀 치워 줄 수 없을까?”

“계속 읽고 있는 책들이라 찾기 편하게 둔 거야!”

“아니, 이 책은 벌써 몇 달째야? 보긴 보는 거지?”

“그럼, 이 작가의 문장이 너무 좋아서 아껴서 조금씩 조금씩 읽고 있다는......”

“여보, 이렇게 두면 지저분해 보이지는 않아?”

“나는 괜찮은데......”

“아니, 그래도. 있는 책들 좀 정리하면 책장에 공간이 생길 거 아냐! 책장에 꽂아서 보면 안 될까?”

“금방 또 읽을 거라서. 이참에 책장을 하나 더 살까?”

“여보~~~”

“하하하. 알았어, 알았어!”


아내에게 시원섭섭한 대답을 남기고 침대에 누워 혹시 모를 기회를 엿보며 집에 있는 책장을 속으로 세어본다. 침실에 하나, 침실 베란다에 하나, 거실에 넷, 서재에 둘. 총 8개다. 부족하다는 생각에 ‘하나를 더 구입하면 어디다 두면 좋을까?’ 상상한다. 핸드폰으로 책장을 검색하면서 괜히 들뜬다. 나는 아내의 안색을 살피며 고요를 즐긴다.


내 옆에 누워있는 아내는 이렇게까지 얘기했으니 책장이 정리되겠지 생각한다. 정리된 책장에 아이들이 읽을 만한 책을 좀 더 사서 책꽂이에 꽂아둘 요량으로 중고등학생 추천도서와 교양서적을 검색한다. 아내는 아이들이 책 읽는 장면을 상상하며 왠지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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