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7년 차, 이제야 보이는 나의 삶
(2023년 2월에 작성한 글입니다.)
열흘 후면 한 회사를 다닌 지 어느덧 6년이 된다. 처음 회사 문을 열고 들어간 것이 엊그제 같은데, 시간이 참 많이도 흘렀다. 지금 와서 고백하지만 입사와 동시에 매일 아침 퇴사를 대놓고 꿈꿔왔다. 이런 내가 이 회사에 아직까지 다니고 있을 줄은 나조차도 몰랐다. 지금도 마음속에 항상 사직서를 품고 다닌다. 스트레스가 극에 치달을 때면 항상 사내 사이트에서 퇴사 버튼을 누르는 상상을 한다. 홀가분하게 그만두는 내 모습을 떠올리면 그렇게 속이 시원해질 수가 없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어제도 오늘도 자본주의 미소를 띤 채 회사와 집을 오가고 있다. 이제는 의문이 든다.
누가 강제로 시키지도 않은 일을 왜 계속하고 있는 것일까?
누군가 나에게 있어 ‘일’이란 무엇이냐 묻는다면 바로 처음 떠오르는 답은 이것이다. ‘응당 해야 하는 것’. 그 앞에는 ‘스스로 밥을 벌어먹고 살기 위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부모님과 학교 선생님들을 통해 들어온 대한민국 어른의 모습이 학습되어 그런 듯하다. 험난한 이 세상을 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며, 그 돈을 벌기 위해 직장에 속해야 한다고 들어왔다. 그리고 번듯한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공부를 ‘잘’ 해야 한다고 어른들은 말했다. 그 말에 나는 당시 대한민국 학생들이 그러하듯이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책상 앞에서 보냈다. 30대가 된 지금 일정한 주기로 통장에 돈이 꽂히는 어른 비슷한 모습이 되었다.
이것이 전부일까? 소개팅을 시켜주던 친구들과의 대화가 떠오른다. 지인의 지인이라 소개하며 소개팅 의사를 묻는 친구들의 말은 항상 이렇게 끝났다. “~ 일을 하는 사람이야. 한번 만나볼래?” 나 또한 상대방들에게 똑같이 소개되었을 것이다. “~일을 하는 친구인데 한번 만나보는 것 어때?” 이처럼 일은 사회적으로 나를 표현하는 일차적인 수단이기도 하다. 직장과 직급을 소개하는 동시에 내가 버는 돈, 하루 일과 등이 한 번에 설명이 된다. 그래서일까. 취업 준비를 할 때 내가 가장 많이 고려했던 것은 회사의 규모와 연봉, 사회적 이미지였던 것 같다.
정리해 보면, 나에게 있어 일이란 사회적 자아를 구현하는 수단이다. 내가 속한 조직과 그 안에서 내가 벌어 들이는 자금으로 나의 이미지를 만들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침마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어 향하는 나의 직장은 나를 “대기업 회사원”으로 만들어준다. 턱없이 부족한 인원을 갈아 넣어 프로젝트의 생명을 연명하고 있는 나의 팀은 나에게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라는 타이틀을 붙여주었다. 그리고 매달 25일 즈음 내 통장을 스치고 지나가는 작고 소중한 나의 월급은 “안정적인 연봉”으로 나의 신용 점수를 높여준다. 즉, 지난 6년 동안 내가 만들고자 한 것은 이 타이틀이었다. “대기업에서 안정적인 연봉을 받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덕분에 그토록 원하던 타이틀을 가지게 됐다. 전문성 있어 보이는 이력과 두둑이 쌓인 적금도 덤으로 얻게 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 행복하지 않다. 사회적 이미지를 만드는 데 모든 시간을 쏟아부어서 그런 것일까?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가져본 것이 언제인지 아득하다. 좋아하던 아침 운동, 밤 산책, 독서 등을 즐겨본 지 오래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어떤 취미를 가진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일에 대한 계획과 일정이 뚜렷하다. 반면 나의 인생에 대한 계획과 방향성은 안개에 가린 듯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다. 빛나는 명찰 뒤로 아직은 많이 어린 나의 내적 자아가 웅크리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에 대한 소개를 할 때면 어딘가 주눅 들어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겉보기에 자랑스러운 타이틀도 냉소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단순히 내가 부정적인 사람이라서, 나의 직장이 신의 직장이 아니라서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알고 있다. 성장하고자 하는 내적 자아의 목소리를 무시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사회적 이미지를 만드는 데 열중하느라 ‘나’의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을 회피해 왔다. 결국 내가 일궈온 일은 나에게 있어 ‘좋은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나에게 있어 ‘좋은 일’의 기준을 다시 정의해 보았다. ‘하고 싶은 일’+‘성장’.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직장”을 다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정말 즐거움을 느끼는 “직업”을 가지고 싶다. 같은 개발 업무라도 배움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더 이상은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도 없는 공장형 개발자가 되고 싶지 않다. ‘나’라는 사람에 대해 고찰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일을 하고 싶다.
일을 위해 내 삶을 포기하는 인생이 아닌, 일을 통해 풍요로워질 수 있는 내 인생을 살고 싶다. 사회적 자아와 내적 자아 사이의 균형을 이루는 ‘일’을 하며 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