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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ㅂ ㅏ ㄹ ㅐ ㅁ Sep 01. 2023

우리 다시 만날까?


한 사람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 형성을 잘해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나를 놓치곤 했고, 나를 놓치지 않으려 '나다움'을 추구하다 보니 주변이 휑해진다.


개인적, 이기적인 사람이 차갑게 여겨지던 어느 시기의 나는 군중 속에 속해 튀지 않으려 노력했고, 불편한 마음을 꿀꺽 삼켰다. 내 옆에 누군가도 그렇게 여러 날 마른 마음을 삼키느라 목이 매였겠지.


나를 이해하는 '한 사람'이면 족하다는 이런 메시지들이 많다.


'맞아.. 그러면 되지. 한 사람도 없다 싶으면 내가 나에게 그 '한 사람'이 되어주면 그만이야.'


그런 다짐들이 왜 이리 건조한지 모르겠다.


'우리'가 그립다고 선 그 안에 '저 다움'들을 실현하는 사람 사이에서 나는 개개인이 앉아 있는 '독서실 칸막이'를 연상한다.


나를 지키기 위해 배우는 방패와 창이 유튜브를 열면 비법 창고처럼 즐비하다.

어쩌다 보니 내 앞에서 대화하는 그 이의 창과 방패가 보인다.


나는 전쟁 중인가?

날아오는 창에 방패로 가리거나 조금 더 강한 창을 맞받아쳐 돌아오는 길 승리의 희열을 느끼고 있다.


'오늘 누가 나한테 이런 뾰족한 창을 겨누는 걸 이런 비법으로 공격했어!'라며 통화하는 목소리가 우렁차진 않았나.


한 사람에서 시작된 이 생각은 '寒(찰 한) 사람'에 이르고 만다.


따듯한 곳으로 가고 있는데 왜 나는 더 추운 사람이 되고 있는가.


따듯한 곳에 이르렀는데 나는 이미 식어버렸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온갖 그럴싸한 것들을 빼고, 결국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탄생과 동시에 주어진 사명 같다.


사랑받고, 사랑을 주라.

주된 사명에서 사랑받는 것에 더 주력하느라 제대로 된 사랑을 주지 못했다.


제대로 된 사랑을 줄 수 있을 때, 진짜가 시작되는 건 아닌가.

누군가는 다수에게 누군가는 단 한 사람을 위해.


그 한 사람에 들지 못해 외로웠던 순간을 겪은 이들도 많기에 우리 곁엔 이렇게나 '한 사람'을 주제로 한 음악과 글들이 넘치고 있었다.






'우리'와 '함께'가 오래된 '희망'이라는 단어처럼 낡아 보인다.

머지않아 '나다움' 'Na'에서 '모두'를 되찾고자 애쓸 것 같다.

이젠 애를 써야 '우리'가 되어버린 이 씁쓸함과 '나'라는 집단의 간결함에 익숙해져 버린 '나'

나이가 들어 관계의 무게를 덜어버려 느끼는 감정인지 멀게만 느껴지는 관계의 결속이 새삼 그립다.


'이젠 안녕'을 어깨 두르며 부르던 그때의 아쉬움이 한때 불어오는 가을바람을 닮았다.





서로 가야 할 길 찾아서 떠난 '우리'는

또 다른 '우리'가 아니라

진정한 '나'를 향하고 있었다.


 '나'를 만났다면

'우리' 다시 만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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