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큰 트림 소리였다.
아직 식사도 끝나지 않았는데,
맞은편에 앉은 부모님이
방귀 소리만큼이나 큰 트림을 하셨다.
순간, 매너 없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자식 어릴 적,
분유를 먹인 뒤에는 30분이고 품에 안고
등을 두드려 트림을 시켜야
내 속이 다 시원했던 기억이 난다.
그 마음과는 전혀 다른 기분에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언제부턴가 나 역시 소화가 잘 되지 않아
자주 체하는 일이 생기고 나서야
트림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게 되었다.
나이 든 부모님께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떠오르는 책 글귀가 있다.
"웬만한 사람은 다 아이들을 사랑하고
특히 제 자식은 똥도 예뻐한다
그러나 제 부모가 어린애가 되어버린 걸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똥이라도 싸게 되면 그 노인은
자신의 똥까지 예뻐하면서 길러준
부모라는 걸 부정하고 싶도록 정이 떨어진다.
그야말로 부모 자식 간의
최악의 파국이다.
그런 죽음은 육신의 고통을
모면할 수 있다고 해도
육신의 고통과 바꾸고 싶지 않을 만큼
그게 훨씬 더 무섭다."
-박완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中
이 글은,
어쩌면 최악의 파국을 막기 위한
방파제인지 모른다.
내 죄책감을 다독이고,
부모가 느꼈을 수치심을 전하며,
장례식장에서의 울부짖음으로
효를 대신하려던 얄팍한 마음에
따끔한 백신주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