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인가 후배가 술에 잔뜩 취해 말했다.
“선배, 선배는 왜 아무것도 없으면서 자존감이 높아요?
누가 보면 부잣집 딸인 줄 알겠어. 부잣집 딸도 아니야. 이쁜 것도 아니야. 일도 맨날 실수하면서 왜 세상이 다 자기편인 것처럼 해맑아요? 짜증 나게”
이 말을 들은 날은 술 취한 후배를 달래느라 대충 얼버무렸지만 이 질문은 내내 내 가슴에 남아 있었다. 후배 말은 다 맞았다. 가진 건 쥐뿔도 없으면서 나는 무슨 자신감으로 그렇게 해맑은가? 내 인생의 가장 큰 궁금증이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 질문은 내가 엄마가 되고 나서야 알았다. 내가 힘든 순간에도 툭툭 털고 일어나고, 세상이 마냥 내 편인 것처럼 해맑았던 이유.
부모님 때문이었다.
우리 엄마는 20살, 아빠 25살에 나를 낳았다. 아빠 친구들이 내가 ‘미리 나와서 미리’라고 놀렸을 만큼 엄마 아빠는 너무 어린 나이에 부모가 됐다. 내가 사춘기를 지나던 14살 때 우리 엄마는 고작 34살이었고, 내가 20살 때 우리 엄마는 40살이었다. 지금의 나보다 어린나이다. 시람들은 엄마를 생각하면 울먹이며 시작하지만 나는 우리 엄마를 생각하면 웃음부터 나온다. 그 일화 중 하나를 얘기하자면, 고등학교 때 버스를 타고 가다가 엄마와 끝말잇기를 했다.
미리 : 지우개
엄마 : 개새끼
미리 : 아~엄마!! 누가 끝말잇기에 욕을 해. 다시 해
엄마 : 개로 시작하는 게 그것밖에 생각이 안 나는데 그럼 어떻게 해
미리 : 아, 다시 해~ 아가씨
엄마 : 씨발놈
미리 : 엄마!!!!!!!!!!!!!!!!!!!!!!!!!!!!
나의 엉뚱함은 우리 엄마의 유전자임이 확실하다. 이런 엄마는 나보다 내 친구들이 더 좋아해서. 우리 집은 친구들의 아지트였고, 엄마는 내 친구들의 친구였다.
이런 엄마가 나를 키우면서 가장 많이 해줬던 말은 “예쁘다”였다.
TV를 보고 있으면 “어머~ 우리 미리는 어떻게 코가 이렇게 예쁠까” 하면서 만져주고
밥 먹다가 갑자기 “우리 미리는 얼굴이 달걀형이라서 너무 예뻐” 해주고
아침에는 “우리 딸은 자는 모습도 예쁘네” 하며 깨워주고
아파서 학교를 못 갈 것 같다고 하면 “여자는 아플 때 청순해서 제일 예뻐. 너 지금 청순가련한 여주인공 같아. 너무 예뻐”라고 말해줬다.
엄마는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아무 때나 나의 미모를 진심으로 감탄해 줬다. 지금도 엄마를 만나면 첫마디는 “어머~~ 우리 미리는 볼 때마다 이뻐지네”라고 한다. 그럼 남편과 아이들은 질색팔색 하지만 나는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엄마의 그 말이 너무 좋다. 엄마의 이런 칭찬이 자존감을 높이는데 진짜 효과가 있었는지 의심이 들겠지만 나는 정말, 진심, 리얼 100%로 어릴 때부터 내가 예쁘다고 생각했고, 모든 사람들이 나를 예쁘다고 생각하는 줄 알고, 좋아하는 모든 남자에게 두려움 없이 고백했다.
그렇다고 엄마에게 맞지 않고 고이고이 자란 건 절대 아니다. 어느 날은 빗자루가 부러지도록 맞아본 적도 있고, 소시지(옛날 도시락에 들어가는 긴 소시지)로도 맞아보고, 마른오징어로도 맞아봤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딱히 엄마가 무언가 위로가 되는 말을 해줬던 기억도 없다.
엄마가 해준 건 친구 때문에 고민하면 “아이고, 염병 똥 싸고 있네. 그런 애랑 놀지 마”라고 말해줬고 성적 때문에 고민하면 “공부 안 해도 돼~ 엄마랑 이렇게 살면 되지 뭐가 걱정이야”라고 해줬고 학교 가기 싫다고 하는 날은 “그럼 오늘은 엄마랑 놀러 가자” 하고는 선생님에게 전화해 주셨다. 늘 그렇게 말해주는 엄마가 있어서 엄마에게는 어떤 고민도 털어놓을 수 있었고, 내 마음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엄마의 이런 양육관은 중학교 때부터 담배를 피우던 불량 청소년(남동생)에게 빛을 발했다.
중 2 때 담배를 피우다 딱 걸린 남동생한테 “느그 아부지 아들인데 담배를 안 피우는 것이 이상하지. 엄마는 아빠 담배 피우는 모습에 반했다”라고 했고, 오른쪽 팔에 용문신을 하고 나타난 남동생한테는 “남자가 몸에 용 한 마리는 키워야지”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 집은 불량청소년들의 아지트였고, 엄마는 그 방에 술과 제육볶음을 넣어 주며 “나쁜 짓을 집에서 하니 얼마나 다행이니”하셨다.
그때는 우리 엄마가 다른 엄마들과는 다르다고만 생각했는데 내가 엄마가 되어보니 절대 따라 할 수 없는 스케일이었다. 어느 날은 엄마에게 우리를 키웠던 양육방식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키울 수 있는지 물어봤다.
“그게 뭐가 어려워? 내가 낳은 내 새끼 편을 엄마가 안 들어주면 누가 들어줘? ”
라며 쿨하게 말했다. 내가 아이를 키워보니 그게 제일 어렵던데 말이다. 1살의 아이에게도, 14살이 아이에게도 엄마처럼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는 건 너무도 어렵던데. 1살 때는 왜 그렇게 우는지, 14살 때는 왜 그렇게 말투가 버릇이 없는지 이해도 안 되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던데 엄마는 그게 가장 쉬운 일이라고 하셨다.
내가 결정적으로 우리 엄마를 인정하게 된 건 우리가 IMF의 여파로 고향을 떠나 도시의 반지하방에서 살게 됐던 때다. 그때가 아빠 45살, 엄마 40살. 내가 20살, 남동생이 16살 때였다.
그때 엄마가 했던 말은 평생 잊히지 않는다.
“미리야. 엄마는 지금 너무 감사해. 살면서 이런 큰 고난이 한 번쯤은 세게 오기 마련인데 지금 이 시기에 와서 얼마나 다행이니. 엄마아빠 모두 건강하고, 너희들 다 컸으니 이제 우리는 다시 올라가기만 하면 돼. 그러니까 우리 속상해하지 말고 감사하며 살자”
이 말은 내가 힘들 때마다, 내가 바닥이라고 생각할 때마다 나를 일어나게 하는 말이었다. 아빠는 건설현장 일용직으로, 엄마는 파출부로, 나와 동생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각자 그 시간들을 힘들게 견뎌냈지만 반지하방에서 우리는 슬프지만은 않았다. ‘긍정적으로 살자’는 류의 말들은 세상에 차고 넘치지만 엄마가 삶으로 직접 보여준 ‘긍정과 감사의 힘’은 내 삶에 가장 크고 단단한 버팀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