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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석 Nov 18. 2024

레드 콤플렉스 19화(2부 4화)

땜빵용 기타리스트(1)

패리의 말처럼 어쩌면 나는 불행 앞에서 담담할 수 있는 사람인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성이처럼 행운 앞에 담담할 수 있는 사람은 못되는 모양이었다. 이번만큼은 마루타도 별 수 없었다. 두 손을 모아 쥐고 오른발 앞꿈치로 떨듯이 땅을 구르며, 나는 눈을 감아 펼쳐 놓은 어둠의 세계에서 홀로 부유했다. 


멍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몸은 노곤했다. 그 노곤한 와중에 심장은 어둠의 세계를 울리고도 남을 만큼 크게 뛰었고, 다듬어지지 않은 통나무의 표피처럼 건조하고 딱딱하던 피부가 소름을 털었다. 무의식의 육체만이 본능적으로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것도 격동적이고, 감동적인 움직임으로. 나는 머리와 영혼을 대신하여 이 상황을 인식해준 내 몸뚱이에 감사했다.

 

도저히 눈앞에서 들리는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다. 편안하고, 자유롭고, 온화한 성이의 목소리가 반복적이면서도 이따금 변주되는 기타루프를 넘나들며 먼지가 무겁게 떠도는 지하세계를 울렸다. 그것은 세계를 깨우는 울림 같았다. 


색 띠의 환영이 뒤엉킨 암흑의 세계에서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레드 제플린이니, 너바나니, 포카리스웨트니 하는 따위의 이름을 가진 사내들이 그동안 습관적으로 소리죽여 몸 안으로 삭이던 날숨을 그제야 세계 밖으로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 날숨은 이제 피부에나 겨우 문신처럼 남은 그들의 이름을 미숙하지만 간절한 기세로 세계를 향해 실어 날랐다. 


내게 Delight는 기적이었다. 그것을 처음 만나던 날도, 그것과 재회한 날도. 나는 내게 예기치 못하게 찾아온 이 두 번째 기적을 믿을 수가 없었다. 눈을 감아버린 탓에 모든 것은 환상이나 환영처럼만 느껴졌다. 나는 이 기적이 정말 환상으로 끝날까봐 겁이 났다. 그래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쉽사리 모든 것을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것은 어쩌면 순수한 내 용기가 아니라, 먼저 눈을 뜨고 막힌 숨을 풀어낸 이 세계의 누군가 덕분이었을지도 모른다. 언뜻 누군가의 손이 어색하게 내 어깨를 토닥이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겨우 눈을 떴을 때, 성이는 아직 열심히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의 입술은 담배 연기를 뿜어낼 때처럼 조곤조곤하고 수줍은 모양새였다. 그의 얼굴은 그가 늘 짓고 있던 익숙한 미소를 가득 드리우고 있었다. 


그런데 과연 그것을 가득이라 표현해도 될까. 그의 미소는 분명 그의 얼굴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의 모든 인상이 그 미소를 따라 형성됐다. 하지만 그의 미소에서는 압도적인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평화로웠다. 미소가 그의 얼굴 전체를 감싸고 있긴 했지만, 그 이면에, 혹은 어렴풋이 느껴지는 여백에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기운이 안개꽃처럼 흐드러졌다. 


그 기운은 세계를 아우르는 선(善)의 기운이나 생명의 기운 같았다. 사람과 세계를 평화롭게, 아름답게 아우르는 묘한 미소였다. 언뜻 그 미소는 평소 성이의 그것을 닮은 듯 보였지만, 완전히 다른 것 같은 느낌이기도 했다. 그것은 사람의 미소가 가진 일반적인 가치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조금 전 성이의 기타 연주를 이야기하다가, 패리는 내게 물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그 물음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다시 묻는다면, 나는 분명히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성이는 기타와 노래를 절대 놓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절대로 그래서도 안 되는 사람이었다. 


“괜찮았어?”


연주를 마친 성이가 우리를 둘러보며 물었다. 조금 전의 그 놀라운 기운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그의 미소는 보기 좋았다. 조금 전 세계를 가득 메웠던 평화와 행복의 여운이 그 안에 남아있었다. 패리는 성이의 물음에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워주었다. 지하세계의 지친 남자들은 소리 없이 휘파람을 불었다. 그리고 나는 아무 것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불안정한 눈빛으로 그를 뚫어져라 바라볼 뿐이었다.


“비싼 노래 잘 들었다. 네 노래도 들었고, 이 친구 얼굴도 봤으니 난 이만 가 봐야지.”


패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성이가 물었다. 


“벌써 가게?” 

“아까 얘기 했잖아. 열쇠 받으러 온 거라고. 이제 슬슬 영업 시작 해야지.”

“그럼 잘 가. 또 연락할게.”

“너무 자주는 하지 마라. 마루타, 잘 있어. 다음에 또 보자.”


패리는 내게 손을 한 번 흔들어 보이고는 곧 연습실을 나갔다. 그러나 나는 연습실을 나가는 그에게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했다. 그럴 정신이 없었다. 


“어때? 좋은 사람 같지?”

성이가 내게 물었다. 그러나 그런 얘기는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너였구나?”


그의 질문과는 전혀 상관없이 나는 말했다. 그의 연주가 시작될 때부터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오직 그 뿐이었다. 그러나 그게 무슨 뜻인지 알 리 없는 성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무슨 소리야?”

“나 네 노래 들어본 적 있어.”

“그럴 리가 없는데. 난 밴드에서도 기타만 쳤지 노래는 해본 적이 없어. 혹시 내가 공연하는 걸 봤다고 해도 노래하는 걸 듣지는 못했을 텐데.”

“공연에서가 아니야.”


나는 성이에게 지하철에서 그녀를 만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축구를 그만 두던 그 날, 무작정 지하철에 오른 것부터 그녀를 만나 녀석의 Delight를 만나고, 그 이후로 구형 워크맨으로 날마다 도시의 Delight를 반복해서 듣게 된 것까지. 지난 약 10개월의 시간동안 나를 지배했던 그날의 사건을 천천히 이야기했다. 


흥분하고, 감격한 상태였지만 나는 되도록 천천히, 그리고 담담하게 말하기 위해 애썼다. 행운은 너무 소리 내서 말하지 않는 법이라는 말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거기다 온 몸이 경직되어 말이 쉽게 나오지 않은 탓도 있었다. 


내 말이 이어지는 동안 성이의 눈빛은 수시로 변했다. 당황한 듯 위태로워지기도 했고, 무겁게 가라앉기도 했으며, 이따금은 아예 잠시 눈을 감아버리기도 했다. 녀석의 눈빛을 보면서 나는 조금 서운했다. 그렇게 수시로 변하는 와중에도 그의 눈에서는 별로 반가운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전체적으로 난감하거나 우울한 기색이 역력했다. 전혀 나와 비슷한 감정이 아닌 것 같았다. 


“그 사람 누구니? 여자친구?”


이야기가 끝나고 잠시 성이의 분위기를 살피다 나는 물었다. 녀석은 잠깐 눈을 감았다 뜨더니 두 손을 모아 입을 가리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우리 누나.”


한숨을 쉬고도 몇 초는 더 지난 후에야 여전히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녀석이 대답했다. 녀석의 말에 왠지 안도감이 들었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안도감이 들었고, 그 감정은 성이의 반응에서 느꼈던 서운함보다 더 커서 조금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그랬구나. 누나는 지금 뭐해? 잘 지내?”


가볍게 웃음을 지어보이며 녀석에게 물었다. 반가웠다. 나의 Delight를 부른 주인공을 마주하고 있다는, 그리고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반가운 마음으로 물음을 던지고 기다렸다. 여전히 얼굴에 미소를 띤 채 녀석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의 목소리와 언어로 전해지는 그녀의 지금을 들으며 좀 더 크게 웃을 수 있기를 바랐다. 


“죽었어. 지난겨울에.”


하지만 성이의 대답은 내 기대와는 너무도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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